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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충청 역사문화 다시 보기

럭키홍 2010. 3. 22. 16:44

   

[김갑동 교수의 대전충청 역사문화 다시보기]⑩백제유민의 동향

 

신라, 귀족 편입·정신적 유산 존속 등 포섭정책 펼쳤지만… 백제 유민 ‘조국 부흥’ 신념·긍지 못꺾어
▲충남 연기군 전동면 비암사 3층 석탑. 이 탑 상륜부에서 국보 제106호 ‘계유명전씨아미타불삼존석’ 상이 발견되었다.

백제가 멸망하자 당은 백제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하여 이를 병합하려 하였다. 그러나 신라의 항거로 실패하였다. 결국은 신라가 당군을 물리치고 671년 사비(泗沘)에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함으로써 백제는 완전히 신라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신라에서는 백제 유민들을 포섭하고 백제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여러 가지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였다. 제일 먼저 들 수 있는 것이 백제인들을 신라의 귀족으로 편입하는 정책이었다. 공을 세운 백제인들에게 그 공로의 대소와 지위의 고하에 따라 신라의 관등이나 관직을 주었다. 문무왕 13년(673) 백제에서 온 사람들에게 내외 관직을 주었는데 그 관등(官等)의 서열은 본국에서의 관직을 보아 정했다. 백제의 달솔(達率)에게 경관(京官)의 대나마(大奈麻)를 주고, 백제의 은솔(恩率)에게는 나마(奈麻)를, 덕솔(德率)에게 대사(大舍)를, 한솔(扞率)에게 사지(舍知)를 주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들 수 있는 것은 백제인들의 정신적 유산을 나름대로 존속시켜 주는 정책을 취하였다. 그들의 수호신으로 여겼던 산(山)을 신라의 정식 사전(祀典)에 편입하여 국가적인 차원에서 숭배하였다. 신라는 통일 후 전국의 산천을 3등급으로 나누어 숭배하였다. 대사(大祀)·중사(中祀)·소사(小祀)가 그것이다. 대사(大祀)에 속하는 삼산(三山)은 통일 이전부터 중시되어 오던 산이었다. 삼산의 명칭은 나력(奈歷)·골화(骨火)·혈례(穴禮)였다. 이는 모두 경주 부근에 있는 산이었다. 그러나 중사나 소사에 해당하는 산천의 지역 분포를 보면 전국에 걸쳐 있다. 즉 옛 백제 지역이나 옛 고구려 지역에 있는 산천도 다수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옛 백제 지역의 산천으로 5악의 하나인 공주의 계룡산을 비롯하여 4진(四鎭)의 하나인 가야갑악(加耶岬岳 : 충남 예산)·4해(四海)의 하나인 부릉변(未陵邊 : 전북 옥구)·4독( 四瀆)의 하나인 웅천하(熊川河 : 충남 공주)·상조음거서(上助音居西 : 충남 서천)·오서악(烏西岳 : 충남 홍성)․청해진(淸海鎭 : 전남 완도)·가림성(加林城 : 충남 부여)·월나악(月奈岳 : 전남 영암)·무진악((武珍岳 : 광주)·서다산(西多山 : 전북 장수)·동로악( 冬老岳 : 전북 무주) 등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들 옛 백제 지역의 산천 분포를 보면 통일 후 옛 백제 지역에 설치된 3주(州) 중 웅천주(熊川州)에 집중되어 있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는 백제의 수도였던 웅진(熊津 : 현재의 충남 공주)과 사비(泗沘 : 현재의 충남 부여)가 웅천주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궁극적인 목적은 이 지역의 반신라적 감정을 완화시키려는 목적에서 이들 지역의 산천을 사전(祀典)에 편입시켜 제사한 것이 아닌가 한다. 종래 백제에서 중시하던 이 지역의 산천을 신라에서도 중요 치제(致祭)의 대상으로 지정하여 백제 유민들을 회유하려 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신라 정부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백제의 유민들은 나름대로 독자적인 의식을 가지고 백제인으로서의 긍지를 잃지 않았다.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 1960년에 충남 연기군 전동면 비암사(碑岩寺)에서 발견된 ‘계유명전씨아미타불삼존석상’(癸酉銘全氏阿彌陀佛三尊石像)의 명문이다. 그 내용을 보면 계유년(癸酉年)에 전씨(全氏)를 비롯한 몇 사람이 한 마음으로 아미타불과 관음보살·대세지보살상상(大世至菩薩像)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계유년은 문무왕 13년(673)을 말한다. 또 전씨(全氏)와 미차(彌次) 등 50여인의 지식인들이 국왕(國王)과 대신(大臣) 및 7대의 부모(父母)를 위하여 절을 지었다는 내용도 들어 있다.

그런데 절과 불상을 조성하는데 참가한 참여자 명단에 달솔(達率) 신차(身次)가 맨 먼저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달솔은 백제의 제2관등인데 여기에 보이고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다 신라식 관등을 갖고 있는데 신차만이 백제 관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대부분의 백제인들이 국가가 멸망한 입장에서 신라의 관등을 순순히 받았지만 일부는 이를 거부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었다. 673년은 백제가 멸망한 지 13년이 지난 시점이지만 아직도 백제인들의 저항과 불만이 식지 않은 때였다. 또 신라가 고구려까지 멸망시킨지 5년이 지났지만 당나라의 야욕으로 당과 신라가 불편한 관계에 있던 시점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신라는 백제인들에게 신라식 관등을 주었지만 이를 거부하는 일부 백제인들은 그들의 관등을 용인해 준 것이라 하겠다. 당을 상대해야 하는 입장에서 이들에게 강력한 조치를 취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50여 명의 지식인들이 절을 지었던 진정한 뜻은 멸망해 버린 백제의 국왕과 대신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나 한다. 즉 겉으로는 신라의 국왕과 대신들을 위해 만든다는 명분을 내걸었지만 내면적으로는 잃어버린 조국에 대한 향수와 부흥의지로 절을 세웠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아직도 달솔이란 백제 관등을 갖고 있는 신차가 지식인들의 맨 처음에 쓰여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비록 백제는 멸망했지만 백제 유민들은 아직도 자신들의 조국을 잊지 못하고 그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 언제든지 자신들의 조국을 되찾겠다는 신념과 의지를 갖고 있었다.

이는 고승 진표의 경우에서도 엿볼 수 있다. 진표는 통일신라시대 9주 중의 하나인 전주 의 김제군 만경현 대정리 사람이었다. 그는 12세에 출가하여 열심히 정진한 끝에 선계산 불사의암(不思議庵)에서 지장보살을 친견하였다. 신라 효성왕 4년(740)의 일이었다. 그 후 그는 김제에 금산사(金山寺)를 창건하고 거기에 미륵장육상(彌勒丈六像)을 봉안하였다. 그리고 금강산에 들어가 발연사(鉢淵寺)를 세우기도 했다.

그런데 ‘송고승전(宋高僧傳)’을 보면 그가 백제인으로 되어 있다. 그가 주로 활동했던 시기가 경덕왕대(景德王代 : 742-765)임을 미루어 볼 때 이미 백제가 멸망한 지 100여년 가까이 지난 시기이다. 그런데도 그가 신라인이 아닌 백제인으로 씌여있는 것은 진표가 스스로 백제인으로 자처했거나 백제 유민임을 강조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또한 신라에 대한 반항심의 표현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이같은 자존심은 언젠가는 쇠망한 조국을 되찾겠다는 국가의식으로 승화될 수 있었다.(대전대학교 인문예술대학 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