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광복절의 의미

럭키홍 2008. 8. 27. 10:26

 

 

 

 

63주년 광복절(光復節)
(2008년 8월15일)  
 광 복 절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난 것을 기념하고,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경축하는 날. 8월 15일.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어 우리나라가 독립하였고,

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49년 10월 1일 이 날을 광복절이라 하고

국경일로 정하였다(법률 53).

 광복절의 유래

 

 광복절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의미있는 경축의 날이기도 하지만

1948년  8월15일 우리 대한미국의 정부가 수립된 것을 공포한 경축일이기도 하다.
 1895년 강화도 사건을 계기로 일본의 간섭을 받아 오던 우리 나라는

청일,노일 전쟁을승리로 이끈 일본에 의해 1910년 8월 29일 합방되고 말았다.
 36년간의 생활은 너무도 굴욕적이고 비참하였다. 우리의 기본권을 박탈당하고

강제 노동과 강제징병, 징용에 시달리며 우리의 역사, 언어, 문자까지도 탄압에 굴복 당하였다.

그뿐 아니라 심지어 이름과 성도 일본식으로 고치게 하였고 전쟁물자와

식량의 공급을 위한 각종 약탈을 감행하여 괴롭혔다. 이와 같은 온갖 탄압 속에서
  조국광복을 위한 지하운동을 맹렬히 벌렸으며 해외에서는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광복군 등의 조직에 의하여 항일 투쟁을 계속하였다.

한편 1943년 11 월 카이로 회담을 통하여 미,영,중의 원수가 모여서

우리의 독립을 밝혔고 1945년 7월의 포츠담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재확인하였다.
 1945년 8월 히로시마 나가사끼에 떨어진 원자탄의 위력에 놀란 일본은

그 달 15일에 무조건 항복을 하였으며 아울러 우리는 해방을 맞이한 것이다.   

 

민족 해방과 대한민국의 건국

 

 일제말기에 10년간 우리는 일본의 혹독한 학정을 받아왔다.일본은 만주를 침략하면서부터

많은 군수품을 필요로 하였다.따라서 농업에 중점을 두던 한국의 산업을 바꾸어서
  군수공업과 광업에 치중하기 시작하였다.그후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싸움을 넓혀가는 동안 한국을 병참기지로 삼아 더욱 식량과 원료를 약탈하였다.
 한편 일본은 우리의 민족의식과 문화를 완전히 없애버리고 민족을 말살하려는 수작을 하였다.

한글을 쓰지 못하고 일본말을 사용하게 강요하였고,황국 신민의 서사라는 것을 외우게 하여

우리의 성명까지도 일본식으로 고치게 하였다.그후 전쟁이 일본에 불리해지자
 일본은 사람들까지도 마구 징벌하였다.지원병 제도를 만들어 청년들을 속여서

일선으로 끌어가고 다시 징병제도니 학병이니 하여 모든 청년과 대학생을 끌어가기 시작하였다.

또 청년장년을 군사실과 군수공업 또는 탄광으로 끌고가서 강제노동을 시켰다.
 일제가 최후 발악을 하고 우리가 사선에서 허덕일 때도 비밀히 지하운동을 통하여

민족의 해방을 꾀하는 여러 지사가 있었다. 해외에서도 임시정부 등의 항일 투쟁을 계속하였고 

광복군 등의 군대를 조직하여 일본군과 싸웠다.1943년 11월에 미국,영국,중국의 3국 원수는
  카이로에서 회의를 열어 일본의 영토 문제를 토의하고 카이로 선언을 하였다.

이 선언은 특히 한국을 독립시킬 것을 밝혔다.1945년 7월의 포츠담 선언은 한국의 독립을

약속한 카이로의 결의안을 재확인하고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였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와 떨어진 원자탄의 위력에 놀란 일본은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였다.
 1945년 8월 15일은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한 날인 동시에 우리가 해방된 날이었다.

8,15 해방은 우리에게 곧 독립까지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하여

이북에는 소련군대가 진주하여 각각 군정을 펴려고 하였다.두 세력의 대립으로 인하여
 남북은 화해하지 못하고 뜻하지 않게 국토와 민족과 사상이 둘로 갈라져 대립하게 되었다.

남한의 민주진영은 유엔의 협조를 얻어 전국민의 자유의사 대로 남북을 통한 총선거를 실시하여

국토를 통일하고 주권을 회복하려 하였으나 소련과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이 반대하였다.

이에 유엔은 1948년 2월 가능한 지역부터 하기로 결정하였다. 선거를 1948년 5월 10일

유엔 한국위원단의 감시밑에 남한에서 역사적인 총선거가 단행되었다. 그 결과 국회가 소집되고

헌법이 제정되어 초대 대통령으로서 이승만 박사가 취임하여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자유민주의 국가로서 발족한 대한민국은 1948년 12월

파리에서 열린 유엔총회에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 받았다.  ball.gif

 

광복절(光復節)노래

작사: 정인보
작곡: 윤용하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기어이 보시려던
어른님 벗님 어찌하리
이날이 사십년
뜨거운피 엉긴자취니
길이길이 지키세
길이길이 지키세
꿈엔들 잊을건가
지난날을 잊을건가
다같이 복을 심어
잘가꿔 길러 하늘닿게
세계의 보람될
거룩한 빛 예서 나리니
함께 힘써 나가세
함께 힘써 나가세... ball.gif
가사와 악보  
광복절노래
어린이 합창단
광복절노래 동영상
- 행정자치부 국가기록원 제공
- 1958년 국립영화제작소 제작 
 



ball.gif
 

 

광복절 관련 사진모음
 

 

위 사진은 59년전 8월 15일 조국이 일제로 부터 해방돼 서울 시민들이 남산 국기게양대에

처음으로 태극기를 게양하는 장면. 이 사진은 촬영한 사람이 누구인지,

태극기를 게양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확인되지 않은 정부 자료 사진입니다.

또한 사진에 대한 해설도 불충분 합니다. 해방 한달쯤 뒤 국민학교가 개교해 첫수업을 하는 장면, 우리나라 최초의 천연색 사진으로 알려진 해방 1주년 기념행사 사진 등

귀중한 사료도 포함돼 있습니다.

 

일왕(日王) 히로히토가 45년 8월15일 정오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미영중소 연합군에게

항복을 발표하자 서울 광화문 네거리으로 나와 환호하는 서울 시민들의 모습.

 

 무조건 항복한다는 일왕의 육성방송을 듣고 있는 서울의 일본인들. (1945년 8월15일)

 

8.15 조국 해방은 옥중 독립투사들에게 더욱 감격스러운 것이었다.

사진은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 풀려 나와 해방 만세를 외치는 출옥 애국인사들과

이를 환영하는 시민들의 모습이다. (1945년 8월15일)

 

조국의 해방을 환호하는 서울역 광장과 남대문로 일대의 인파 만나는 이마다 서로 부둥켜 안고

목이 터져라 해방 만세를 외치면서 밤이 되어도 흩어질 줄을 몰랐다.

 

 

1945년 광복

 

 

일제로부터의 해방을 축하하기 위해 전남 광양 서국민학교 교정에 모인 군민들.

(1945년 8월15일)

 

 

전남 광주에서의 8.15해방 경축 퍼레이드

 

 

1945년 8월15일 美, 英, 佛, 蘇 등 전승국 언론들과 미국에서 발간되던 독립신문은

日帝로부터의 한국 해방을 "테러와 억압에 대한 승리"로 보도하면서

앞으로의 향방에 대한 분석기사까지 곁들였다.

 

 

전국에 메아리친 해방의 기쁨 조국해방은 방방곡곡 어디라 할 것 없이 기쁨과 감격의 물결을

이루게 했다. 사진은 1945년 8월16일 전남 광양읍 목성리에서 주민들이

해방을 축하하며 환호하고 있는 모습이다.

 

 

시민환영 받는 몽양 여운형 선생 45년8월16일 휘문고 교정에서 연설하기에 앞서

시민들의 환영을 받고 있는 몽양(앞쪽 가운데).

 

 

몽양 여운형(呂運亨) 1945년8월16일 해방직후, 휘문학교에서 해방의 기쁨을 전하는 여운형.

 

몽양 여운형(呂運亨) 1945년8월16일 해방직후 휘문고보 교정에서 연설하는 몽양.

 

 

백범 김구선생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환국 .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중경을 떠나는 김구일행. 왼쪽으로부터 이청천장군, 안미생(김구선생의 자부) 김구,

그리고 그뒤에 윤경빈

 

 

임시 정부 귀국 환영 꽃전차

 

 

36년만의 광복을 맞은 임시정부의 김구주석이 감격어린 표정으로 귀국

동포의 뜨거운 영접을 받았다.

 

 

임정귀국 축하행진 임시정부의 귀국을 맞아 서울시내 곳곳엔 환영아치가 세워졌고

학생들의 축하 시가행진도 잇달으면서 임정에 대한 국민적 여망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갔다.

 

 

조국으로 돌아온 임정요인들 왼쪽 세번째가 법무위원이었던 이시영다음이 주석 김구,

부주석 김규식, 외무부장 조소앙, 내무부장 신익희 순이다.

 

 

총독부 광장의 게양대에서 일장기가 내려지고 있다. (1945년 9월9일)

 

 

조선총독이 주한미군사령관에게 항복한 직후인 1945년 9월9일 오후 철수하고 있는 일본군

 

 

해방후 국민학교 첫개교 해방 약 한달 뒤인 1945년 9월24일 전국에서

국민학교 교육이 일제히 시작되어 빼앗겼던 우리말 우리글을 가르치는 감격을 맛보았다.

사진은 첫 수업

 

 

해방 직후의 시골 국민학교 교실 진흙 화로 둘레에 배치한 간이 책상에 옹기종이 모여앉아

 진지한 얼굴로 되찾은 우리 글을 익히고 있다. 사진은 강원도의 한 산골.

 

 

해방경축 종합경기대회 1945년 10월27일에 열린 이 대회는 해방후의 첫 전국체전으로

태극기를 든 손기정씨가 감격에 벅차 눈물을 닦고 있다.

 

해안경비대의 해방경축행진 창설 당시 3백명에 불과했던 경비대가

대원 1000여명의 해안경비대로 발전 해방1주년 경축행진을 벌이고 있는 모습이다.

(1946년 8월15일) 다시는 외세의 침탈로 조국산하를 부끄럽지 않게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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