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전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예수가 죽었다. 아무도 그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왜 그가 그토록 무기력한 모습으로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맞았는지 말이다. 그의 제자들은 더했다. 예수가 죽음을 맞는 순간까지도 제자(사도)들은 스승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했다. 다시 말해 ‘예수가 누구인가’를 알지 못했다.
그때만 해도 예수가 뿌린 말씀의 씨앗은 유대교의 울타리 안에 머물러 있었다. 대부분 유대인이었던 제자들은 예수 사후에도 여전히 유대교의 율법과 안식일을 지키며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올렸다. 그러니 당시 예수의 가르침은 ‘변방의 가르침’에 불과했다.
그랬던 기독교가 어떻게 세계로 퍼져 갔을까. 예루살렘의 테두리를 벗어나 어떻게 로마로, 유럽으로 흘러 갔을까. 불과 2000년 만에 그리스도교(개신교+가톨릭)는 세계에서 가장 큰 종교로 성장했다.
신자 수만 무려 22억 명에 달한다.
그런 성장의 물꼬를 튼 이가 바로 사도 바울(바오로)이다.
바울 당시 고린도는 부유한 도시였다. 왼쪽에 돌이 깔린 레가이온 길은 도시 중심부에서 항구까지 이어져 있었다. 뒤편 멀리 솟은 산(아크로 고린도) 꼭대기에 아프로디테 여신을 모셨던 신전이 보인다. |
터키의 안디옥 지역에 세운 개신교회 창립 10주년을 맞은 광림교회(담임 김정석 목사)의 성지순례 일정에 동행했다.
지난달 26일부터 열흘간 그리스와 터키를 오가며 ‘사도 바울의 전도지’를 훑었다.
그리고 거기서 바울을 만났다. 바울의 서신과 목숨을 건 여정, 그 너머에 그리스도가 있었다.
3회 시리즈로 그 발자취를 따라간다.
밧모섬·에베소(그리스·터키)=글·사진 백성호 기자
◆ 목숨을 건 전도여행
지난달 27일 터키의 이스탄불에 도착, 곧장 그리스 아테네로 갔다. 비행 시간은 고작 1시간30분.
사도 바울은 이 길을 지팡이를 짚고서 걸어 갔다. 그가 걸었던 길만 무려 7만㎞에 달한다. 네 차례에 걸친 바울의 전도여행은 목숨을 건 여정이었다.
그런 바울을 묵상하며 아테네 공항에 내렸다.
아테네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파르테논 신전이었다. 도시국가였던 아테네의 높다란 언덕에 세워진 거대한 신전이다. 2000년 전 바울도 이 신전과 마주했다. 바울이 넘어야 했던 거대한 산이기도 했다. 그 산의 이름은 ‘다신교(多神敎)’. 신화와 전설이 뒤얽힌 그리스의 종교였다. 그들 앞에서 바울은 ‘하나의 신(一神)’을 설파해야 했다.
오랜 세월 유대인은 메시아를 기다렸고, 지금도 기다리고, 앞으로도 기다릴 터이다. 그러나 범신론적 세계관을 가진 그리스인에겐 메시아란 관념이 없었다.
아테네 사람들은 ‘부활(아나스타시스)’이란 말을 수용할 수 없었다. 대신 그들은 희로애락이 넘실대는 신화, 인간의 이성과 지혜를 중시했다. 파르테논 신전도 지혜의 신인 아테네 여신을 모셨던 곳이다. 신전 한가운데에는 천장까지 닿는 거대한 아테네 여신의 석상(지금은 소실됨)이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창과 방패를 든 여전사인 아테네 여신이 도시를 지켜준다고 믿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설하는 바울의 이야기는 그저 ‘멀리서 날아온 이국의 종교’로 비칠 따름이었다.
파르테논 신전에 올랐다.
아고라(광장)가 내려다 보였다. 거기서 바울은 에피쿠로스(쾌락주의) 학파나 스토아(금욕주의) 학파와 열띤 논쟁을 벌였다. 파르테논 신전 근처의 언덕에는 바울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설했다는 법정 터가 남아 있었다.
바울은 거기서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는 살지 않는다. 인간의 예술과 상상으로 빚은 금상, 은상, 석상을 신과 같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테네 사람들은 바울을 철저히 외면했다. 결국 바울은 아테네 선교에서 참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2000년이 지난 지금, 기독교는 그리스의 국교가 됐다. 그리스인의 98%가 그리스 정교회를 믿는 기독교인이다. 바울은 그때 알았을까. 자신이 심은 씨앗이 수백 년, 수천 년이 넘어서야 열매가 맺힐 거란 사실을 말이다.
◆고린도에서 묻는 바울의 지혜
버스를 타고 고린도로 향했다.
아테네에서 고린도까진 2시간30분 거리였다. 고린도는 아테네·스파르타와 함께 그리스의 3대 도시국가였다. 바울 당시에는 거대한 무역도시였다. 고린도는 양쪽 겨드랑이에 커다란 항구를 끼고 있었다. 하나는 이오니아해, 또 하나는 에게해와 통했다. 그래서 성경에는 고린도가 사람이 몰리고, 상업이 성하고, 돈이 넘치고, 타락한 도시로 묘사돼 있다. 로마 시대에는 75만 명까지 살았다고 한다.
지금의 고린도는 달랐다.
붉은 개양귀비꽃이 여기저기 들판에 흐드러진, 오렌지 농사를 주로 짓는 소담한 농촌이었다. 고린도 역시 아테네와 비슷했다. 도시 한가운데 우뚝 솟은 산 위에 옛 신전이 있었다. 미(美)의 여신 아프로디테(비너스)를 모신 곳이었다. 바울 당시, 이 신전에는 1000명이 넘는 여사제가 살았다고 한다. 그들은 신을 모시는 몸으로 죄를 씻어주겠다며 거액을 받고 몸을 팔기도 했다고 한다.
고린도에 바울은 18개월간 머물렀다. 그리고 교회를 세웠다. 바울의 서간 중 가장 긴 편지가 바로 ‘고린도 전·후서’다. 그만큼 할 말이 많았다는 얘기다.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했다.
“지혜로운 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율법학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은 것으로 만들어 버리지 않으셨습니까?
유대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고린도 전서 1장)
고린도의 들녘에 섰다.
바람이 불었다. 눈을 감았다. 그랬다. 오랫동안 바울은 고민했던 것이다.
“무엇이 진정한 지혜인가. 나의 지혜인가, 세상의 지혜인가. 그도 아니면 대체 무엇인가?”
2000년 전, 이 도시 어딘가에서 바울은 밤을 새며 묵상을 했을 터다. 그리고 바울은 그 답을 길어 올렸다. 그는 먼저 보라고 했다. 나의 지혜, 세상의 지혜가 어리석음을 말이다. 그걸 깨우치라고 했다.
왜 그럴까.
“나는 어리석다”“세상은 어리석다”는 걸 진정으로 인정할 때 비로소 나와 세상이 무너지는 법이다. 그렇게 나의 지혜, 세상의 지혜가 ‘우르르’ 무너지는 자리로 하나님의 지혜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2000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썼던 편지의 수신인은 사실 2010년을 살아가는 우리들 자신이다. 아무리 첨단 기계와 문명과 통신이 발달해도 인간의 지혜, 인간의 삶은 결국 ‘오십 보 백 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끊임없이 나의 지혜, 세상의 지혜를 통해서 삶의 해답, 인생의 대안을 찾으려 한다. 바울은 그 한계를 지적했던 것이다.
그리스 철학은 서양철학의 모태다. 그리스인의 지혜, 그리스인의 철학을 향한 바울의 일갈은 결국 서양철학을 향한 일침이기도 하다. 바울은 ‘나’가 무너진 자리에 그리스도의 지혜, 하나님의 지혜가 밀려온다고 했다. 이건 논리나 철학으로 뱉을 수 있는 얘기가 아니다. 그건 자신의 지혜를 실제 허물었던 이들만이 던질 수 있는 소리다. 그곳으로 밀려오는 그리스도의 밀물, 하나님의 밀물을 체험한 자만이 토할 수 있는 살아서 꿈틀대는 소리다. 우리가 바울의 서신을 통해 그리스도의 소리를 듣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에베소로 배를 타고 떠났던 겐그레아 항구로 갔다. 허름한 나룻배 한 척이 보였다. 바울도 저런 목선을 타고 에게해를 건넜을 것이다. 그런 바울을 좇아서 배를 탔다. 에게해는 짙디 짙은 코발트 빛이었다.
"눈에 보이는 신’믿는 이방인에게
‘보이지 않는 신’설파한 바울
터키의 사르디스에 있는 아데미 신전의 유적. 왼쪽에 벽돌로 쌓은 사데 교회(초대 일곱 교회 중 하나)의 풍경이 보인다. 어마어마한 신전과 조촐한 교회의 모습이 대조적이다. 바울의 전도는 그리스와 로마의 신들 사이에 ‘예수의 씨앗’을 심는 일이었다. |
지난달 27일 오후 10시에 밤배를 탔다.
그리스 고린도에서 밧모(파트모스)섬으로 갔다.
밤 파도가 뱃전을 때렸다. 출렁이던 달빛이 그때마다 부서졌다. 2000년 전, 사도 바울도 에베소를 향해 이 뱃길을 지났다. 바울의 밤바다는 지금보다 훨씬 험난했을 터이다.
이튿날 오전 7시에야 밧모섬에 도착했다.
밧모섬은 바울과 동시대 인물이었던 사도 요한의 유배지였다. 바울과 더불어 ‘그리스도교 최초의 신학자’로 꼽히는 요한은 이곳에서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을 썼다. 섬에는 지금도 그 자취가 흘렀다.
◆ 요한의 동굴, 요한의 기도
밧모섬의 산 꼭대기로 갔다.
작은 교회당의 계단을 내려가자 길이 10m쯤 되는 동굴이 나왔다. 요한 계시 동굴이었다. 로마 시대, 밧모섬은 중범죄자들의 유배지였다. 섬에는 온갖 흉악범들이 살았다고 한다.
요한은 그들을 피해 일부러 가파른 길, 험한 동굴에 거처를 정한 걸까. 당시 요한은 연로했다. 90세가 다 된 나이에 그는 밧모섬에서 18개월이나 살았다.
동굴 암벽에는 요한이 엎드려 기도한 뒤 일어설 때 짚었다는 홈이 파져 있었다.
젊은 시절, 요한은 욕심이 많았다. 그는 형제인 야고보와 함께 예수에게 이렇게 부탁했다.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 들어주십시오. 주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 중 하나는 주의 왼편에, 또 하나는 주의 오른편에 앉게 해주십시오.”
이 말을 듣고 다른 열 명의 사도들은 분노했다고 한다.
그러나 예수는 요한에게 이렇게 답했다.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요한과 야고보는 “할 수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그 말을 듣고 예수는 이렇게 답했다.
“너희 가운데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그때만 해도 요한은 몰랐을 터이다. 예수가 받을 잔이 어떤 잔인지 말이다. 그건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이 저를 비켜가게 하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라고 예수조차 땀을 핏방울처럼 흘리며 기도했던 ‘십자가 죽음’이었다.
어둑어둑한 요한의 동굴, 거기서 눈을 감았다. 대체 뭘까.
‘예수가 마셨던 잔’
‘십자가 죽음’의 진정한 의미는 뭘까.
2000년 전, 사도 요한 역시 이 동굴에 머물며 그걸 묻고, 또 물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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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요한이 성령의 계시를 받았다는 밧모섬의 동굴에서 순례객들이 성경 구절을 묵상하고 있다. | |
요한은 동굴에서 하늘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기록했다.
“다 이루어졌다. 나는 알파이며 오메가다. 시작이며 마침이다. 나는 목마른 사람에게 생명의 샘에서 솟는 물을 거저 주겠다.”(요한계시록 21장6절)
그랬다. 예수의 십자가는 생명의 샘으로 통하는 통로였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그 통로를 몸소 보여준 것이었다. 그게 십자가였다. 그건 내 뜻을 향한 온전한 죽음이자, 하나님 뜻을 향한 온전한 수용을 의미했다.
요한의 동굴 근처에 성 요한수도원(1088년 건립)이 있었다. 그리스 정교회의 수사들이 지금도 수도를 하고 있었다. 수도원 박물관에는 양피지에 기록된 큼직한 초기 성경도 전시돼 있었다. 그리스도교의 2000년 역사가 숨 쉬는 밀물로 다가왔다.
오후에 배를 타고 터키 땅 에베소로 향했다. 1시간쯤 지나자 파도가 거세졌다. 배가 앞뒤좌우로 휘청휘청했다. 그렇게 한동안 달리다 결국 배를 돌려서 밧모섬으로 돌아갔다. 예정에 없던 밧모섬의 1박이었다. 숙소 뒤 산 위로 요한 수도원이 보였다. 밤하늘에 별들이 무척 낮게 깔렸다. 이 밤, 수도원의 수사들도 요한복음의 한 구절을 묵상하고 있을까. “하나님은 빛이시며 그분께는 어둠이 전혀 없다.”(요한복음 1장5절)
◆ 나를 허물 건가,
신을 허물 건가
이튿날 아침 일찍 배를 탔다. 파도는 잔잔했다. 에게해를 건너 터키 땅 쿠사다시에 도착했다. 거기서 버스를 타고 초대 교회들이 있던 곳으로 이동했다. 에게해에서 멀지 않은 터키 땅에 초대 일곱 교회가 있었다.
그 중 하나인 사데 교회로 갔다. 차에서 내려 5분쯤 풀밭을 걷자 어마어마한 신전 유적이 나타났다. 다산과 풍요의 여신인 아데미를 모셨던 신전(알렉산더 대왕의 명령으로 BC 330년경 건립)이었다. 입이 쩍 벌어질 만한 규모였다. 옛날에 78개의 석주가 늘어선 모습은 장관이었을 터다. 지금은 높이 18m의 거대한 석주 2개가 남아 있었다.
신전 귀퉁이에 있는 사데 교회의 유적은 초라해 보였다. 웅장한 신전과 조촐한 교회의 모습이 무척 대조적이었다. 바울 당시에도 이런 풍경은 꽤 흔했을 터이다. 이방인을 향한 바울의 전도 여정은 사실 그리스 신들과 로마 신들의 틈새에 ‘예수의 씨앗’을 심는 일이었다. ‘눈에 보이는 신’을 믿는 이들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을 설파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번은 그리스의 신을 믿는 이가 바울에게 물었다. “이 많은 신들의 석상 중 당신이 믿는 신은 어느 신이오?” 주위를 둘러보던 바울은 석상을 하나 발견했다. 그 아래 ‘이름 없는 신’이라고 씌어져 있었다. 바울은 그 석상을 가리키며 “내가 말하는 신은 바로 저 ‘이름 없는 신’이오”라고 답했다.
초대 교회 유적지에는 들꽃이 곳곳에서 한들거렸다. 그 꽃들은 이름을 갖기 전부터 존재했다. 그 앞에서 눈을 감았다. 그랬다. 신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이 이름을 붙이기 전에 이미 신이 있었다. 그런데도 인간은 끊임없이 신에게 이름을 붙였다.
오늘을 사는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쉬지 않고 ‘이름 없는 신’을 향해 이름을 붙인다.
나의 바람, 나의 욕망, 나의 가짐을 ‘기도’란 이름으로 포장한 채 신에게 들이댄다.
“하나님! 당신 뜻대로 마시고, 제 뜻대로 하소서”라고 기도를 하면서 말이다.
2000년 전 바울이 낯선 땅의 회당과 신전에서 싸웠던 대상도 이것이었다. 우상(偶像)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사람들은 흔히 돌이나 쇠로 빚은 것을 우상으로 여긴다. 그러나 바울의 메시지는 달랐다. 나의 가짐, 나의 욕망을 위해 부르는 모든 신이야말로 우상 중의 우상이다. 왜 그럴까. 그건 내가 나를 위해 빚은 신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신을 빚지 않았다. 대신 자신을 십자가에 올렸을 뿐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그리스도가 산다.”(갈라디아서 2장20절)
바울은 하나님의 현존을 위해 자신을 그렇게 허물었다. 그건 그리스도교 신앙의 심장이기도 하다. 결국 누구를 허물 건가의 문제다.
나를 허물 건가, 아니면 신을 허물 건가.
◆에베소에서 만난 빛과 어둠
버스는 에베소로 향했다.
로마 시대, 에베소는 아시아 주(州)의 수도였다. 바울 당시에도 25만 명이 살았던 소아시아 최대의 도시였다. 버스에서 내렸다.
에베소 유적지 입구에 ‘누가의 무덤’이 있었다.
팻말에는 한글로 ‘1860년 영국 고고학자가 본 건물의 일부인 십자가와 황소모양이 그려진 비석을 보고 누가의 무덤이었음을 판정하였다. 예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누가복음 19장10절)라고 적혀 있었다.
밧모섬에서 돌아온 사도 요한도 에베소에서 숨을 거두었다. 요한의 묘지도 에베소의 성 요한 교회에 남아 있었다.
에베소에는 무너진 돌과 기둥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옛 신전과 원형극장, 로마식 공중 목욕탕도 있었다. 2000년 전, 돌로 만든 도로가 시내에서 항구까지 이어져 있었다. 2세기에 건립된 셀수스 도서관은 위용이 대단했다. 바울의 첫 전도여행 목적지도 실은 에베소였다. 그러나 바울은 길이 막혀 터키 서부와 그리스 땅을 거친 뒤에야 뱃길을 통해 에베소로 갔다.
바울은 에베소의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에베소서 5장8절)
그랬다. 그건 “그분께는 전혀 어둠이 없다”는 요한의 메시지와도 맥이 통했다. 어둠의 두께, 어둠의 깊이는 ‘나의 뜻’에 대한 집착의 세기와 비례한다. 그걸 알 때 우리는 깨닫는다. ‘나의 뜻’이 무너지는 순간, ‘아버지의 뜻’이 흐름을 말이다.
그게 바로 빛이다. 그러니 아무리 짙은 어둠도, 아무리 깊은 어둠도 빛 앞에서 무너지게 마련이다.
그 순간 바울은 말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그리스도가 산다”고 말이다.
에베소를 떠나 다소로 향했다.
그곳은 바울의 고향이었다. 유년기의 바울과 청년기의 바울은 과연 어땠을까. 또 예수를 직접 본 적이 없었던 바울은 어떤 사연으로 사도가 됐을까. 다소에서 ‘2000년 전의 바울’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슴이 뛰었다.
밧모섬·에베소(그리스·터키)=글·사진 백성호 기자
“당신은 누구십니까”
바울이 물었다 …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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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에서 ‘바울(바오로)은 칼’로 통한다.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성령의 칼은 하나님(하느님)의 말씀이다”라고 말했다. [성 바오로 수도회 제공] | |
이달 1일 터키 남부의 해안도시 다소(타르수스)로 향했다.
2000년 전, 다소는 로마 식민지였다. 지중해에서 가까워 교역이 활발한 큰 무역도시였다. 사도 바울은 거기서 태어났다.
덕분에 헬레니즘 문화권 속에서 자랐다. 유대인이었던 바울은 동시에 로마시민권자였다. 당시 로마는 세계의 중심이었다. 굳이 요즘으로 치자면 ‘미국 시민권을 가진 재미동포’쯤 되는 셈이었다. 그건 이방인을 향한 바울의 시선과 그의 죽음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로마 제국은 이방인에게만 십자가형을 선고했다.
예수와 베드로가 십자가형에 처해 진 것도 로마의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달랐다. 그는 십자가형이 아니라 참수형으로 죽었다고 전해진다. 너무도 모욕적인 십자가형은 로마 시민권자의 몫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바울은 지독한 유대교 율법주의자였다. 그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됐을까.
바울은 터키와 시리아, 그리스를 훑으며 무려 7만㎞를 달렸다. 목숨을 건 전도 여정, 그 에너지의 원천은 어디였을까. 바울의 여정을 좇는 순례길, 그걸 찾고 싶었다.
◆바울의 고향, 다소
버스는 터키의 광활한 들판과 산맥, 호수를 지났다. 그리고 바울의 고향, 다소에 도착했다.
보슬비가 촉촉이 내렸다. 도시는 조용하고 차분했다. 우산을 받쳐들고 바울의 생가 터로 갔다. 마당에는 옛날에 쓰던 우물이 하나 있었다.
순례객들은 손으로 줄을 돌리며 두레박을 끌어올렸다. 물이 무척 맑았다. 순례객들은 두레박에 든 물을 마시며 ‘바울의 자취’를 더듬었다.
바울은 이 도시에서 나고 자랐다.
그는 이렇게 생긴 거리를 걷고, 저렇게 생긴 나무 아래서 쉬었을 것이다. 바울의 집안은 천막을 만들어 팔았다. 지금도 다소에는 염소 가죽을 이용한 천막제조업이 성하다. 바울의 집은 부유한 편이었다. 당시 다소에도 큰 대학이 있었으나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유학을 갔다. 정통 유대교 교육을 받기 위함이었다.
바울의 생가 터에서 나왔다. 거리를 걸었다. 생가 터 옆에 공원이 하나 있었다. 공원의 입구에는 터키어로 ‘SAINT PAUL PARKI(성 바울 공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바울과 예수, 그리고 12사도들은 동시대 사람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목격하지 못했다. 그는 예수를 본 적도 없었다.
그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됐을까.
◆스테파노의 죽음과 바울
예수가 죽은 지 2년쯤 지나서였다. 예루살렘에 있던 바울은 예수의 가르침을 좇던 스테파노(스데반)의 죽음을 목격했다.
스테파노는 유대 법정에서 “예루살렘 성전 예배는 우상 숭배에 지나지 않는다”며 유대교의 율법을 정면으로 비판하다가 성밖으로 끌려나가 돌에 맞아 죽었다.
바울은 그 현장을 지켜봤다.
스테파노는 사람들이 돌로 칠 때도 무릎을 꿇고 “주님, 제 영혼을 받아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숨을 거두는 순간에도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지우지 말아주십시오”라고 간청했다. 그건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저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을 모릅니다. 저들을 용서하소서”라고 했던 예수의 목청과도 통했다.
스테파노의 죽음은 바울에게 무엇이었을까.
바울은 충격을 받았을까, 아니면 분노했을까. 스테파노의 죽음을 통해 바울은 나자렛 사람 예수를 다시 보기 시작했을까. 구원의 통로라고 믿는 유대교 율법을 정면으로 부정하고도 저렇게 당당하고 온화한 죽음을 맞을 수 있다니. 어쩌면 바울에게 그 죽음은 거대한 물음표가 아니었을까.
그 사건 직후 예루살렘에선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가 이어졌다. 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 외곽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바울은 그들을 쫓았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남녀를 가리지 않고 그리스도인을 잡아서 감옥에 처넣었다. 바울은 다마스커스(현재 시리아 영토)까지 쫓아갔다. 거기서 바울은 말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사울(바울의 유대식 이름)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바울은 그 목청을 향해 물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러자 음성이 들렸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다소의 거리를 걸으며 그 순간을 묵상했다. 그랬다. 그건 바울의 율법, 바울의 신념에 금이 가는 순간이었다. 종교의 율법과 계율은 늘 방편이다. 그걸 너무 세게 움켜쥐면 이념이 되고 만다.
율법이 이념이 될 때 신앙은 박제가 된다.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하늘의 음성을 통해 바울에게 던져진 물음은 ‘예수냐, 율법이냐’였다. 그건 갈림길이었다. 숨 쉬는 생명이 될 건가, 아니면 율법의 박제가 될 건가.
◆바울의 물음, 바울의 회심
하늘의 음성을 들은 바울은 눈이 멀었다고 한다.
성경에는 ‘사흘간 앞을 못 보고,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사도행전 9장9절)고 기록돼 있다.
구원의 통로라고 믿었던 율법에 대한 믿음이 와르르 무너진 바울에겐 모든 것이 암흑이었을 터이다. 그 암흑을 헤쳐간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됐다.
그러자 ‘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 되었다’(사도행전 9장18절)고 한다.
다소의 거리에 바람이 불었다. 그랬다. 우리의 눈도 마찬가지다. 생명에 눈 멀고, 진리에 눈 멀 때 우리의 눈도 비늘에 덮인다. 그러니 예수를 박해하는 이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지지고 볶는 일상에서 우리는 시도 때도 없이 예수를 박해한다. 예수의 가르침에 눈을 감고, 예수의 이웃에게서 고개를 돌리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예수는 묻는다.
“○○야, ○○야,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우리는 바울처럼 묻는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때마다 우리의 가족, 우리의 친구, 우리의 이웃이 그 답을 대신 한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예수를 박해하는 순간은 로마 시대만이 아니었다. 종교가 세상의 권력이 됐던 중세 때만도 아니었다.
‘아버지의 뜻’을 외면하고 ‘나의 뜻’을 고집하는 그 모든 순간이 예수를 박해하는 순간이다. 그러니 우리는 매 순간 물을 뿐이다.
“나는 지금 예수를 외면하고 있진 않나. 나는 지금 예수를 박해하고 있진 않나.”
그걸 묻고, 또 물을 뿐이다.
바울은 그렇게 회심했다.
그리고 내달렸다. 바울은 전도 여정에서 유대인들에게 다섯 차례나 몰매를 맞았고, 돌에 맞아 죽을 뻔했고, 파선도 세 번이나 당했다. 밤과 낮, 하루를 꼬박 바다에서 둥둥 떠다니며 표류한 적도 있었다. 바울은 결국 네로 황제의 그리스도인 박해 때 로마에서 죽임을 당했다.
버스에 앉아 바울의 생가를 바라봤다.
다시 눈을 감았다. 무엇이었을까. 목숨을 걸고 바울이 전하고자 했던 건 진정 무엇이었을까. 빗방울이 차창을 때렸다. 순례객의 가슴도 때렸다. 그랬다. 그건 종교의 틀, 종교의 껍질이 아니었다. 율법도 아니고, 제도도 아니고. 교회의 벽돌도 아니었다.
그건 생명이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그리스도가 산다”(갈라디아서 2장20절)고 바울이 고백했던 영원한 생명이었다.
버스는 다소를 떠났다. 그러나 우리의 순례는 끝나지 않았다. 내가 사는 게 아니라 내 안의 그리스도가 살 때까지 말이다. 거기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다소(터키)=글·사진 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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