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 김지하
어지럼증을 앓는 어머니 앞에
그저 막막하더니
집을 나서는데
다 시든 낙엽을 밟으니
발바닥이 도리어 살갑구나.
가을 - 정호승
하늘다람쥐 한 마리
가을 산길 위에 죽어있다
도토리나무 열매 하나
햇살에 몸을 뒤척이며 누워있고
가랑잎나비 한 마리
가랑잎 위에 앉아 울고 있다
가을 - 조병화
어려운 학업을 마친 소년처럼
가을이 의젓하게 돌아오고 있습니다
푸른 모자를 높게 쓰고
맑은 눈을 하고 청초한 얼굴로
인사를 하러 오고 있습니다
"그동안 참으로 더웠었지요" 하며
먼 곳을 돌아돌아
어려운 학업을 마친 소년처럼
가을이 의젓하게 높은 구름의 고개를 넘어오고 있습니다
가을꽃 - 박성룡
차겁지만
그렇게 차겁지는 않게,
뜨겁지만
그렇게 또 뜨겁지도 않게,
가을꽃들 피어난다.
먼 길 가다가 외진 곳 들국화,
교정이나 단독주택 뜰귀의 살비아,
바람 센 들판의 코스모스 등속
식어가는 하늘가에 가을꽃들 피어난다.
벌써 또 한 해가 기우는가,
인생이 이우는가,
풀잎들 메말라가는 창틈에
차거운 바람 스미면서
저무는 해 재촉하느니
가을꽃 - 손병흥
마른 풀향기 그윽한 어느 가을날
홀로 찬바람 불어오는 산자락 따라
더욱 따사로운 미소로 피고지는 가을꽃
그 기품 그 기개 매력 쫓아
찬이슬 훑어가며 한번 더 보고픈
거친 비바람 된서리 조차 물리쳐버린
당당하게시리 겸손 잃지 않은 채 피어나는 꽃
눈에 잘 띄는 화려한 뜨락피해
스스로 외롭게 피어난 쓸쓸한 삶
그저 소신껏 피고 지는 청결 고아한 기상
때 되면 아낌없이 스러져버릴 줄 아는 지혜
가을볕 서늘바람 속에서도 그 향길 내뿜는
엷은 고통속에서도 풍기려드는 가을꽃 몸가짐이
그날따라 너무나 신선하고 감동스럽기조차 하였다.
가을꽃 - 정호승
이제는 지는 꽃이 아름답구나
언제나 너는 오지 않고 가고
눈물도 없는 강가에 서면
이제는 지는 꽃도 눈부시구나
진리에 굶주린 사내 하나
빈 소주병을 들고 서있던 거리에도
종소리처럼 낙엽은 떨어지고
황국도 꽃을 떨고 뿌리를 내리나니
그동안 나를 이긴 것은 사랑이었다고
눈물이 아니라 사랑이었다고
물 깊은 밤 차가운 땅에서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 꽃이여
가을밤 - 윤석중
문틈에서
드르렁드르렁
"거, 누구요?"
"문풍지예요."
창밖에서
바스락바스락
"거, 누구요?"
"가랑잎예요."
문구멍으로
기웃기웃.
"거, 누구요?"
"달빛예요."
"
가을사랑 - 도종환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할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나의 마음은 바람부는 저녁숲이었으나
이제 나는 은은한 억새 하나로 있을 수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눈부시지 않은 갈꽃 한 송이를
편안히 바라볼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끝없이 무너지는 어둠 속에 있었지만
이제는 조용히 다시 만나게 될
아침을 생각하며 저물 수 있습니다
지금 당신을 사랑하는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하는 잔잔한 넉넉함입니다
가을의 기도 - 김현승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가을 저녁의 시 - 김춘수
누가 죽어가나보다
차마 다 감을 수 없는 눈
반만 뜬 채
이 저녁
누가 죽어가는가 보다.
살을 저미는 이세상 외롬 속에서
물 같이 흘러간 그 나날 속에서
오직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애터지게 부르면서 살아온
그 누가 죽어가는가 보다.
풀과 나무 그리고 산과 언덕
온누리 위에 스며 번진
가을의 저 슬픈 눈을 보아라.
정녕코 오늘 저녁은
비길 수 없이 정한 목숨이 하나
어디로 물 같이 흘러가 버리는가 보다.
가을하늘 - 변종윤
드높은 구름
멀어진 하늘
고추잠자리 밭을 갈고
들녘엔 곡식들이
탐스럽게 무르익는 가을
내 두 손 펼쳐
가슴에 안아주련다.
고마운 가을 어머니가 삶아주신
밤고구마 바구니 담아
조잘대며 먹다보면
노을이 가을하늘에
한 폭 수채화 되고
우리 마음도 붉게 타오르는
설렘으로 한 편의 동시를 쓴다.
가을하늘을 보며 - 박재삼
일년 중 제일로
찬란하게 내리는
이 햇빛을 송두리째 받고
지금 곡식이 팽팽하게
여물이 다 든
이 빛나는 경치를 보게.
거기다 바람까지
살랑살랑 어느새
찬바람을 거느리고
잎새 둘레에 왔네.
이런 가을을
그 많은 세월 중
4분의 1이나 맞이하는 것이
얼마나 기특한지 몰라.
물 맑고 공기 좋은
여기를 피하고
도회지로 몰린 사람들아.
사람이 살기 편한
이 절실한 가을을
몸에 붙이지 않고
살이 어떻게 찔꼬.
섭섭하게
아주 섭섭하게
가을하늘만 드높이 개었네.
귀뚜라미 우는 밤 - 김영일
또로 또로 또로
귀뚜라미 우는밤
가만히 책을 보면
책속에 귀뚜라미 들었다
나는 눈을 감고
귀뚜라미 소리만 듣는다
또로 또로 또로
멀리멀리 동무가 생각난다
낙엽 - 공재동
가을
나무들
엽서를 쓴다
나뭇가지
하늘에 푹 담갔다가
파란 물감을
찍어내어
나무들
우수수
엽서를 날린다
아무도 없는
빈 뜨락에
나무들이
보내는
가을의 엽서
낙엽소리 - 이생진
이거야
가을의 꽃이불
바로 이거야
나를 그 위에 눕게 하고
누워서 백운대 넘어가는
구름을 보며
이거야 바로 이거
나는 하루종일 아이가 되어
뒹글뒹글 놀다가
어미가 그리우면
아이처럼 울고
이거야 이거
낙엽에 띄우는 엽서 - 고은영
잘 가라 그대
기쁨이 되었던 그대
사랑으로 머물던 지상에
행복했던 기억을 접고
찬란한 웃음을 떼어놓으며
암전으로 돌아서 가는구나
아, 고뇌의 흔적으로 비워 낸 넋들은
그 뜨겁던 청춘을 내려놓고
고통으로 멍든 붉은빛 눈물과
이별을 수놓는 노란빛 손수건을 흔들며
이제 떠나가는구나
저 먼 레테의 강
단풍 - 김종상
빨갛게 익어가는 감을 닮아서
잎사귀도 빨갛게 물이 들었네.
감나무에 떨어진 아침 이슬은
감잎에 담겨서 빨강 물방울.
샛노란 은행알이 달린 가지에
잎사귀도 노랗게 잘도 익었네.
은행나무 밑으로 흐르는 냇물
은행잎이 잠겨서 노랑 시냇물.
당신의 가을하늘이 있으면 - 정세일
당신이 가지고 있는
가을하늘이 있으면
나에게 그 가을하늘을 보내주십시오
당신이 그 가을하늘을
보내주신다면 누구나 하늘높이 떠서
새털구름처럼 날개를 만들어
날고 싶어하는 가을꿈을 만들어서
언제든 누구에게나
마음이 어두운 사람들에게
그 가을하늘을 나누어주겠습니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가을하늘을 오늘
나에게 보내주신다면
그리움처럼 모락모락 피어나는
뭉게구름만을 모아서
솜사탕처럼 손에 잡히는 달콤함과
사근거리는 아름다움을 느끼도록
마음이 외로운 사람들에게
가을하늘을 나눠주겠습니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그 가을하늘에 오늘은
하늘을 하얗게 날개를 달아주는
새털구름도 높이 떠있고
그리움을 손으로 잡을 수 있는
뭉게구름도 모락모락 피어납니다
오늘 나는 당신이 보내주신
가을날개로 푸른 새소리를 가지고
노래하면서 당신의 가을하늘로
날개와 솜사탕을 가지려 날아갑니다
울음이 타는 가을강 - 박재삼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강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물 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와가는
소리죽은 가을강을 처음 보것네.
춤추는 코스모스 - 오정방
코스모스가 바람을 흔들지 못하므로
바람이 코스모스를 마구 흔든다
가을을 상징하는 코스모스들이
바람에 흔들려 간지러운듯
몸을 비틀며 하늘하늘 춤춘다
푸른 하늘이
머리 위에서 점점 멀어져가므로
쳐다보느라 고개가 아플텐데도
얼굴엔 함빡 미소를 머금고
기꺼이 손만 흔들어대는 저 여유로움
코스모스 - 박경용
무얼 먹고 저리도
키가 컸을까?
하늘 먹고 컸겠지.
바람 먹고 컸겠지.
무얼 발라 얼굴은
저리 이쁠까?
햇발 발라 이쁘겠지.
달빛 발라 이쁘겠지.
하늘 먹고
바람 먹고
나보다 키클라...
햇발 발라
달빛 발라
나보다 이쁠라...
코스모스길 - 최홍윤
내 일상에 마주치는
저 가볍고 순수한 아름다움이여
긴 목대로 하늘거리는 예쁜 모습은
순수미인의 자태 그대로구나!
가을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지천으로 핀 웃음꽃이
어지러운 세상을 맑게 하고
새벽부터 내 마음 환하게 꽃피웠네
조금은 가냘프긴 해도
겉과 속이 한결같은 순수한 네 속내는
정직을 잃고 더는 잃을 것도 없는
세상 인간들보다 정직하리!
무서리 찬바람에
내 그리움이 더 깊어질까봐
너의 순수함에 반해버린 나는
발목이 시도록 오늘도
너의 곁을 걷고 있다.
코스모스의 사랑 - 조남명
신이 처음 꽃을 만들 때
맨 먼저 만들었다는 꽃
꽃 중의 처음 꽃
살살이꽃 코스모스
가느다란 실허리를
길게 굽어 늘이며
얼굴빛 변하도록
사랑을 기다립니다
빨간 정열로 사랑을 갈구하고
연분홍 설렘으로 지새워
하얗게 바래도록 그리움에 지쳐
사랑을 그리며
애절하게 흔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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