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 사랑방

정겨운 시골의 추억

럭키홍 2007. 6. 2. 11:14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희놈은 상기아니 잃었느냐


        재넘어 사래긴 밭을 언제 갈려하느냐!


                                              / 藥泉 南九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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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시조이면서 이 시조의 배경과 풍경이 서린 곳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드물다. 현대인도 감흥에 빠지면 한 번 읊어 보는 시조가 ‘동창이 밝았느냐- - - “
삼삼오오 대화를 나누다 불쑥 학창시절 배운 시조 한수를 외워보라면 어떤 작품이 먼저 떠오를까? 많은 이들은 남구만이 지은 이 시조를 생각해내지 않을까?


남북교류의 전진기지로 떠오른 금강산 관광 1번지 동해시에 한국문학의 대표적 장르인 시조(時調) 유적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재너머 사래 긴 밭은 지금은 드넓은 담배밭으로 그 옛날 경지 정리가 없던 시절엔 엄청나게 큰, 말 그대로 긴밭(長田)이었다.
농경문화 사회에서 근면성과 농촌의 봄철 풍경을 잘 표현해 우리에게 친숙한 이 시조의 배경은 동해시 망상동 심곡마을.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 1629~1711)은 조선 숙종때 사람으로 개국공신 남재의 후손이다. 효종 2년(1651)에 과거에 합격하고 1656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노론 소론 양파의 거센 당쟁이 소용돌이치는 시대상 속에 약천은 1680년 대제학을 지낸 후 1684년 우의정, 1687년엔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영의정까지 오른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화를 입어 강릉으로 유배되었다가 1년만에 다시 영의정에 임명된 약천은 숙종 당시 격동의 정국을 이끌다 1707년 관직에서 물러났다.


 

약천 남구만이 망상동과 인연을 맺은 것은 1689년 4월. 이때가 그의 나이 61세때였다. 우리가

지금도 애송하는 ‘동창이…’는 유배된 이듬해인 1690년 봄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심곡마을에는 남구만의 호와 같은 약천(藥泉)이란 샘이 있어 더욱 정겹고 친근감이 간다.
심곡마을에는 시조에 등장하는 ‘재넘어’와 ‘사래긴밭(장밭․長田)’이 실제로 소재한다. 약천 샘에서 산쪽으로 약 50m 올라가면 약천사(藥泉祠)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약천사는 심곡마을에서 1년여를 머물다 한양으로 되돌아간 남구만이 세상을 떠난후 그의 깊은 학식과 고매한 인격에 반한 마을사람들이 그를 흠모하여 영정을 모시던 곳이였다. 약천선생의 영정을 모신 마을이라 이곳을 ‘영당(影堂)마을’이라고도 불렀다. 검푸른 바다가 넘실대는 동해휴게소 한켠엔 약천을 기리는 시조비가 1994년 이 고장 뜻있는 이들에 의해 건립돼 잊혀져가는 남구만과 동해의 인연을 간직하고 있다.


이 시조의 당시 풍경을 읊으면서 여행을 떠나는 것도 의미있는 여행이다.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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