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및 명글의 고향

[스크랩] 김재진 시

럭키홍 2010. 2. 17. 11:51

      

     김재진

     거인.국화 앞에서.

     나무. 나무 이야기.

     마음길.먼산 같은 사람에게 기대고 싶어라

     별

     산.시계

     우편배달부

     한여자가 있었네.혼자 가는 여행

 

    거인

사람들은 기도를 무엇을 구하는 것이라 여기네

가까운 이의 죽음 앞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무기력할 때

누군가로 부터 버림 받았을 때

사랑하는 이의 눈동자 속에서 더 이상

내 안을 비추는 따뜻한 빛 찾을 수가 없을 때

답답함이 세력을 얻어 숨조차 쉴 수 없을 때

내일이 안보이는 깜깜함에 갇혔을 때

어딘가에 매달려 사람들은 기도하고 싶어하네

 

한때 내가 사랑했던 사람과

한때 내가 미워했던 사람과

한때 나를 힘들게 했던 그 모든 벽들과

벽들이 갈라 놓은 질식의 공간과

저녁의 식사와 아침의 푸른 공기 사이에 박혀있는

갈구의 절박함

그러나 기도는 뭔가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네

기도는 또 하나의 나

내 안에 숨어 있는 거인을 불러내는 일이라네

 

 

                                  국회 본회의장에서

 

 

 

 

   국화 앞에서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많은 사람들은 모른다

귀밑에 아직 솜털 보송보송하거나

인생을 살았어도 헛 살아버린

마음에 낀 비계 덜어내지 못한 사람들은 모른다

사람이라도 다 같은 사람이 아니듯

꽃이라도 다 같은 꽃은 아니다

누부신 젊음지나

한참을 더 걸어가야 만날수 있는 꽃

국화는 드러나는 꽃이 아니라

숨어 있는 꽃이다

느끼는 꽃이 아니라 생각하는 꽃이다

꺾고 싶은 꽃이 아니라 그저

가만히 바라보는 꽃이다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적은

가을날 국화 앞에 서 보면 안다

산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굴욕을 필요로 하는가를

어쩌면 삶이란

하루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루를 견디는 것인지 모른다

어디까지 끌고 가야할지 모를 인생을 끌고

묵묵히 견디어내는 것인지 모른다

 

 

 

 

    나무

문득 눈앞의 세월 다 지워지고

사람이 아름다울 때 있다

수첩 속에 빽빽하던 이름들 하나같이

소나기 맞은 글씨처럼 자국으로 번질 때

흔적도 없이 사라져갈

사람이 아름다울 때 있다

세파에 치어 각양각색인

남루 또한 지나간 상처 마냥 눈물겹고

이유 없이 그냥 아름다울 때 있다

가파른 세월이야 지나면 그뿐

코끝에 감도는

한자락 커피 향에 두 눈을 감고

비 맞는 나무처럼 가슴 적시는

무심한 몸놀림이 아름다울 때 있다

 

 

 

 

 

    나무 이야기

내 방 창 밖엔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습니다

방이 다 들여다뵈는 유리의 투명함을 가리기 위해

반투명의 겹문이 달려 있는 내 방엔

책들과 낡은 타자기 한 대가 놓여 있습니다

거기서 뒹굴며 나느 글을 쓰고 가끔은 누군가가 보내온

편지를 읽기도 합니다

비 오는 소리에 잠이 깨어 겹문을 열고 창 쪽으로 가던 나는

몰라보게 자란 나무를 보고 놀라고 맙니다

이사 오던 무렵 꼬마이던 나무가 어느새

커다랗게 자라 있기 때문입니다

그제야 나는 오랫동안

창 밖을 내다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창 밖은 바로 세상과 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가 세상을 싫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깨닫습니다

나로부터 잊혀진 나무는 그러나 어느새

커다란 어른이 되어 있습니다

아이일 때 나는 어른이 되는 것이 싫었습니다

지금도 나는 내가 어른인 것이 싫습니다

어른을 싫어하는 내 마음이 물끄러미 나무를 봅니다

나무는 지금 연둣빛 구슬을 굴리고 있습니다

비 맞으며 나무가 굴리고 있는 구슬들은 어쩌면

어릴 적 내가 가지고 놀던 그것들일지 모릅니다

손 내밀어 나는 그것들을 만져봅니다

손끝에 닿는 차가운 감촉이 나를 깨워놓습니다

어른이 되었지만 어른이 되지 않은 것이

세상엔 아직도 있나 봅니다

 

 

   

   마음길

마음에도 길이 있어

아득하게 멀거나 좁을 대로 좁아져

숨 가쁜 모양이다

갈 수 없는 곳과 가고는 오지 않는 곳으로

그 길 끊어진 자리에 절벽 있어

가다가 뛰어내리고 싶을 때 있는 모양이다

마음에도 문이 있어

열리거나 닫히거나 더러는 비틀거릴 때 있는 모양이다

마음에도 항아리 있어

그 안에 누군가를 담아 두고

오래오래 익혀 먹고 싶은 모양이다

몸보다 마음이 먼저가

달그락달그락 설거지 하고 있는 저녁

일어서지 못한 몸이 따라 문밖을 나서는데

 

             디에고 리베라 ㅡ 멕시코 역사

    

 

    먼산 같은 사람에게 기대고 싶어라

감잎 물들이는 가을볕이나

노란 망울 터뜨리는 생강꽃의 봄날을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을까

수숫대 분질러놓는 바람소리나

쌀 안치듯 찰싹대는 강물의 저녁인사를

몇 번이나 더 들을 수 있을까

미워하던 사람도 용서하고 싶은

그립던 것들마저 덤덤해지는

산사의 풍경처럼 먼산 바라보며

몇 번이나 노을에 물들 수 있을까

산빛 물들어 그림자 지면

더 버릴 것 없어 가벼워진 초로의 들길 따라

쥐었던 것 다 놓아두고 눕고 싶어라

내다보지 않아도 글썽거리는

먼산 같은 사람에게 기대고 싶어라 

 

 

 

 

   별

보이지 않지만 별들은

대낮에도 반짝거리고 있다

한 번쯤 하던 일 멈추고

나뭇잎 밟히는 길 위에 나가

하늘을 볼 일이다

힘있는 자라 해도 금 그어둘 수 없는

하늘을 차지한 별들이

다가올 밤을 위해 내공을 쌓는

짧은 그 은둔을 지켜볼 일이다

침묵과 기도만으로도 반짝거리는

은발의 저 수사들이 갈아놓은

무량한 햇살의 채마밭을

한 생각 비워두고 지켜볼 일이다

 

                                 멀구슬나무 

 

 

 

 

    산

그때 내려가라 했을 때 하산해야 했습니다

내 것 아닌 깨달음에 속아 나는 깜빡

잠이 들었습니다

잠 속에서 새가 울었습니다

잠 속에서 우는 새는 깜깜하고 젖어 있었습니다

날개가 없었습니다

날개도 없는 새를 날려 보내기 위해

나는 물 위로 쥐고 있던 화두를 놓아버렸습니다

날개 없는 새가 무용지물이듯

혼자서 깨달은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산을 내려가는 사람들이

나무 속으로 걸어들어가는게 보입니까

 

  

                          

  시계

나면서부터 사람은

시계 하나씩 가지고 산다

평생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안 보이는 시계

몇 시일까? 나는 지금

얼마나 남았을까?

 

 

 

 

  우편배달부

어디까지 갈 것인가 나는 막막한 심정에 기대어

아무것 지닐 거 없는 빈 손으로

꽃 한 송이 마른 벽 위에다

눌러둔다 눈 녹아 질척거리는 바깥 풍경은 더럽고

쓸쓸하다

자본주의의 바퀴들이 만들이 내는 길을

마차 길이라 생각하고 싶은

결심은 부스러지듯 약하고 삶은 한없이

지친다

벨이 울리고 더러운 신발을 소리 내어 옮기며

누군가 올지도 모른다

누운 채 그곳으로부터 쿵쿵 울리는

혹은 여럿 몰려 나가는 소리를 분별하며

천식 심하던 노인은 사각의 관이 닫혀 나가고

누가 결혼하고 누군가 소리 죽여 울고 변함없이 삶이

진저리치는 내내

머리맡에 말라 있는 물그릇과 더러운 이부자리

한없이 열려 있는 귀를 매달아 두며

누군가 말없이 나갔다가 슬그머니 들어오는 동안

세상의 병도 깊어간다 겨울 깊도록 말을 달래야 하는

마부의 한숨도 깊어가고

더러은 눈 위를 발벗은 나는

서성거리다가 지치다간 할 수 밖에 없다

그래 그는 오지 않을 것이다

스물에 부르던 노래 흔적 아픈 길 따라

불멸의 시간에 다친 사람들만 문을 걸고

칠 벗겨진 가죽가방

은빛으로 빛나는 바큇살 번쩍이며

반가운 절망은 오지 않는다

마차길 따라 하염없이 귓바퀴 굴리며

따라가던 마음도 주저앉고

더러운 눈들이 눈물받침을 타고 녹아 내려

빈 가슴 수드려 양철대야 두드리는

그 해의 겨울도 가곤 오지 않을 것이다

 

            뒤러 ㅡ 롯과 가족

 

 

 

 

  한 여자가 있었네

사막의 별 바람 모래 졸졸대며 머리 속을 흘러가는 시냇물

누군가 내 머리 속에 퐁당거리며 돌 던진다

갑작스레 발목 적시는 내 마음의 오아시스

누구나 마음 속에 여자 하나 지니고 산다

오렌지 같은 여자

사탕같은 여자

더러는 사막의 별 같은 여자

가던 걸음 멈춰 돌아다보면

하얗게 피는

그리움같은 여자

종이배 반달 분꽃 접다가 만 색종이 내마음의 별

손가락 사이로 은빛 모래알이 떨어진다

 

 

 

 

   혼자 가는 여행

가을에는 모든 것 다 용서하자

기다리는 마음 외면한 채

가고는 오지 않는 사람을

생각하지 말고 그만 잊어버리자

가을의 불붙는 몸에 이끌려

훨훨 벗고 산 속으로 가는 사람을

못 본 척 그대로 떠나보내자

가을과 겨울이 몸을 바꾸는

텅 빈 들판의 바람소리 밟으며

가을에는

빈손으로 길을 나서자

따뜻한 사람보다 많은 냉정한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보다 더 많은 미운 사람들을

한꺼번에 모두 잊어버리자

한 알의 포도 알이 술로 익듯

살아갈수록 맛을 내는 친구를 떠올리며

강처럼 깊어지자

살아가며 우리가 만나야 했던 미소와 눈물

혼자 있던 외로움 하나하나 배낭에 챙겨 넣고

가을에는

함께 가는 이 없어도 좋은

여행을 떠나자

 

                         오노레 도미에 ㅡ 세탁부

 

출처 : 동해물과 백두산이
글쓴이 : 아침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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