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 갔을 때 그들의 국부(國父)라는 호찌민의 시신이 영구 안치된 기념관을 찾았다. 비가 쏟아졌다가 강렬한 햇볕이 내리쬐는 그런 날이었다. 그런데도 그곳을 참배하려는 베트남 사람들의 행렬은 자그마치 1㎞가 넘었다. 긴 행렬 위에 햇볕과 비를 가리는 천막이 드리워져 있긴 했지만 노출된 곳도 많았다.
놀라운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우선 거의 땡볕에서 한 시간 넘게 기다려야 하는데도 베트남 사람들은 아무도 이탈하지 않고 차례를 기다렸다는 점이다. 둘째 호찌민이 죽은 지 몇 십 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그렇게 참배객이 줄을 잇는다는 사실이다. 국민 전부가 한 번은 물론 여러 번 참배했을 수도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셋째 여자의 경우 어깨가 드러난 옷, 남자의 경우 짧은 바지 등을 입은 사람은 참배할 수 없도록 한 엄격한 그들 나름의 참배예절이 지켜진다는 점이다.
문득 우리는 왜 이처럼 국민적 숭앙을 받는 국가지도자를 갖지 못했으며, 왜 그런 인물을 이끌어내지도, 만들어내지도 못했는가라는 자괴감이 들었다. 우리도 있기는 있다.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 안중근 의사 등등. 그러나 이들은 역사 속의 위인으로 존재하는 경향이 짙다. 그래서 정신적 숭앙은 받아도 국민의 피부에 직접 와닿는, 매일매일의 생활 속에 길잡이가 되는 지도자로 국민에게 각인되지는 않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어낸 현대사 주역으로서의 지도자를 갖지 못했다는 말이다. 아니, 있는데도 서로가 흠집 내고 깎아내려 국민적 일체감을 흐트러뜨리는 분열과 대립의 대상으로 삼았을 뿐이다.
심지어 세종대왕의 부정적 측면, 이순신 장군의 정치성향, 안 의사 가족의 비애국적 행태 등을 드라마·소설 등을 통해 끄집어내고 부각시키는, 정말로 ‘못말리는 민족’이 아닌가 여겨질 때도 있다. 영웅은 태어나는 것이라기보다 만들어진다는 말도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없는 것도 좋은 방향으로 만들어내서 국민에게 교훈을 주는 재료로 삼는 합목적적 접근방식이 필요하다. 그것은 그분들의 개인적 위상을 고앙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국민으로서, 민족으로서 자족감과 자긍심을 갖고 긍정적으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질 수도 있는 일이다. 막말로 하자면 조작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기는커녕 있는 것도 굳이 없는 듯이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이승만·박정희 등 역대 대통령은 아직도 기념관 하나 없이 구천(?)에서 떠돌고 있다. 그분들(경제·사회·문화계 인사들도 마찬가지다)이라고 결함이 없을 수 없다. 잘못 판단했을 수도 있다. 어느 한 면을 보면 나라의 발전에 역행한 점도 있을 것이다. 또 그들의 과거에서 불미스러운 실수, 어두운 구석을 발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도자는 물론이고 한 인간으로서도 공과(功過)는 있는 법이고 그것을 항상 전체적인 면에서 살피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리고 장점이 결점을 덮을 수 있는 정도면 장점으로 가야 하는 것이 이 세상을 보다 풍성하게 한다. 완벽한 인간은 없다. 결혼한 적이 없다는 호찌민도 그 사생활, 여자 문제가 있었지만 그것이 그에 대한 국민의 사랑을 가릴 수 없다는 것이 베트남 사람들의 생각이다.
우리도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 이승만이 4·19의 원인을 제공했지만 독립운동을 했고 대한민국을 건국한 초대 대통령이라는 사실이 지워져서는 안된다. 박정희가 민주인사를 탄압하고 권위주의에 안주했지만 그가 오늘날 대한민국 사람들의 삶의 기틀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나는 개인적으로 우리 현대사의 지도자들을 추앙하는 공간(空間)을 마련하고 그곳에 그분들의 공과를 같이 적시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 공간을 갖는 것이 없는 것보다 국민의 정신건강을 위해서도, 우리의 민족적 자긍심과 일체감을 위해서도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공과를 따지는 일에만 함몰돼 그 분들의 리더십 자체를 부정하고 국민들에게 존경받고 추앙받는 지도자 한 사람 만들어주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리더십의 수치가 아닐 수 없다.
근자에 한 민간단체가 친일인명사전을 만들어 발표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볼 필요가 있다. 그 사전 속에는 우리가 이제까지 우리나라의 건국과 발전에 이바지한 것으로 배웠고 또 그렇게 간주해 온 많은 인물들이 친일인사로 분류돼 있다. 어찌보면 그분들이 과거에 했던 어떤 단편적인 행동이나 발언들을 집어내서 국민 모두에게 ‘네가 잘못 알고 있었던 거야’라며 어깃장을 놓는 데서 쾌감을 느끼는 듯한 인상마저 준다.
설혹 그 분들의 어떤 단편적 행적들이 그랬었다 치자. 그것을 굳이 지금 끄집어내 표면화하는 것이 과연 ‘민족정기를 바로잡는 일’이라고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또 그렇게 해서 얻는 국가적·국민적 이득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아주 파렴치하고 사기적인 사람이 애국자로 180도 둔갑했다면 그런 오류는 바로잡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현미경으로 티끌을 찾아내는 방식으로 우리 과거의 선각자들을 흠집내는 것은 민족 정기와는 무관한 일이다. 나라든, 개인이든 배신자의 수는 적을수록 건강하다.
최근 국회입법 조사처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미국의 인사청문회가 그 대상자의 소견, 미래적 의식, 소신 등을 살피는 데 주력하는 반면, 우리 청문회는 과거를 캐고 신상의 문제를 들추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고 지적했다. 우리가 위대한 지도자를 가질 수 없는 풍토의 일면을 보는 듯하다.
그래서 결국 우리에게는 베트남의 호찌민 묘소나 기념관 같은 것이 없다. 또 있다 해도 그곳처럼 38~40도의 땡볕에서 한 시간 넘게 기다리며 참배하는 국민적 끈기도 있을 것 같지 않다. 이대로 가다가는 아마도 국민적 추앙을 받는 지도자의 묘소나 기념관 하나 갖는 것은 백년하청(百年河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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