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갑동 교수의 대전충청 역사문화 다시보기-최영과 홍산대첩 | ||||||||||||||||||||||||||||||
"비록 몸 늙었으나 구국 일념 뿐" 진두지휘 | ||||||||||||||||||||||||||||||
고려는 그 말기에 이르러 왜구의 침략에 시달리게 되었다. 왜구(倭寇)란 말은 원래 ‘왜(倭)가 노략질하다(寇)’라는 말에서 온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후대에는 명사로 굳어져 고려말기에 노략질하던 왜의 집단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실제 ‘고려사’에는 왜구와 함께 ‘왜적(倭賊)’ ‘왜노(倭奴)’ ‘해적(海賊)’ ‘해도(海盜)’ 등의 표현으로 되어 있다. 이들의 침입은 이미 고려 중기부터 있었다. 그러다가 충정왕 2년(1350)부터 왜구의 침입이 본격화되었다. 즉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그해에 “왜구가 고성(固成)·죽림(竹林)·거제(巨濟)·합포(合浦)에 들어오자 천호(千戶) 최선(崔禪)·도령(都領) 양관(梁琯) 등이 싸워 이를 쳐부수고 삼백여 명을 죽였다. 왜구(倭寇)의 침입(侵入)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라고 되어 있는 것이다. 이후 충정왕 2년만 해도 2월의 침입을 시작으로 4월과 5월·6월·11월 등 계속적인 침략이 있었다. 이 침략으로 전라도의 순천·남원·구례·장흥 등지와 경상도의 동래군 등이 피해를 입었다. 이 때문에 전라도 진도에서는 백성들이 두려워 살지 못하게 됨으로써 현을 내륙으로 옮기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들 왜구는 공민왕대에 들어오면서 더욱 기승을 부렸다. 공민왕 원년(1353) 왜선 50여 척이 합포(合浦 ·경남 마산)를 침략한 것을 필두로 하여 동왕 4년(1356) 왜구가 전라도의 조운선 200여 척을 노략질하기도 하였다. 동왕 6년(1357)에는 왜(倭)가 강화도의 교동(喬桐)까지 침략하였다. 그러나 방어 임무를 맡았던 이운목(李云牧)·이몽고대(李蒙古大)가 겁내어 싸우지 아니하니 왕은 명을 내려 순군(巡軍)에 가두었다. 그리고 경성(京城 ·개성) 일대에 계엄령을 내리기까지 했다. 이제 왜구는 고려의 서울인 개성 근처까지 횡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왜구의 창궐은 우왕대(禑王代 ·1375-1388)에 와서 더욱 극심하였다. 우왕 원년부터 14년까지의 재위기간 동안에 왜구의 침입이 370여 회나 되었던 것이다. 이 왜구는 충청도 지역에도 출몰하였다. 우왕 2년(1376) 왜가 부여에 침입하여 노략질하다가 공주에까지 이르렀다. 목사(牧使) 김사혁(金斯革)이 정현(鼎峴)에서 싸우다가 패전하여 왜적이 드디어 공주를 함락하였다. 양광도 원수(楊廣道元帥) 박인계(朴仁桂)는 공주의 속현(屬縣)인 회덕의 감무(監務) 서천부(徐天富)가 구원하러 나가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그를 목베었다. 왜적이 또 석성(石城 ·부여군 석성면)에 침입하여 노략질하고 태조 왕건의 영정을 모셔놓은 연산현(連山縣 ·충남 논산군 연산면) 개태사를 공격하였다. 그러자 최영(崔瑩)이 이들의 토벌을 자청하고 나섰다. 그리고 왜구를 부여 홍산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홍산대첩(鴻山大捷)이었다. 최영은 충숙왕 3년(1316) 사헌규정(司憲糾正·종6품) 최원직(崔元直)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낸 철원최씨 가문출신이었다. 젊은 시절 그는 아버지가 죽으면서 남긴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유훈을 가슴에 깊이 되새기면서 생활하였다 한다. 우왕 원년(1375) 판삼사사(判三司事·종1품)에 오른 최영은 극심해진 왜구들의 침략을 격퇴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바로 현재의 부여군 홍산면에서 있었던 홍산(鴻山)전투였던 것이다. 당시의 상황을 ‘고려사’를 근거로 보면 다음과 같다. 왜적이 연산 개태사를 도륙하였는데 원수(元帥) 박인계(朴仁桂)는 싸우다 패배해 전사하였다. 최영이 이것을 듣고 토벌을 자청하니 신우는 최영이 늙었다 하여 만류하였다. 최영이 말하기를 “보잘 것 없는 왜적이 이와 같이 난폭하니 이제 그를 제압하지 않으면 후에는 더욱 대처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또 만일 다른 장수를 보내면 확실한 승리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며 그 휘하 군사도 평소에 훈련이 없으니 쓸 수 없습니다. 저는 비록 몸은 늙었으나 뜻은 꺾이지 않아 종묘와 국가를 편히 하고 왕실을 보위하려는 일념 뿐입니다. 곧 휘하를 인솔하고 나가 싸우게 하여 주기 바랍니다.”라고 재삼 요구하였으므로 우왕이 허락하였다. 국가에 대한 충성과 구국의 일념으로 충만해 있었음을 일 수 있다. 이리하여 최영은 밤낮으로 행군하였다. 이때 왜적은 늙은이와 약한 자를 배에 싣고 곧 돌아 가려는 듯한 연막전술을 펼쳤다. 그리고는 몰래 용감한 정예 부대 수백 명을 내지로 깊이 침입시켜 약탈하니 가는 곳마다 수수 방관할 뿐이고 감히 대적하는 자가 없었다. 홍산(鴻山)에 이르러서 함부로 살육과 약탈을 감행하여 기세가 대단히 강성하였다. 최영은 양광도 도순문사 최공철(崔公哲), 조전원수(助戰元帥) 강영(康永), 병마사 박수년(朴壽年) 등과 함께 급히 홍산(鴻山)으로 가서 전투에 앞서 우선 요해처에 의거하였다. 그 곳은 3면이 다 절벽이고 오직 길 하나가 통할 뿐이었다. 모든 장수들이 겁을 먹고 전진하지 못하였으므로 최영이 몸소 사병의 선두에 서서 정예군을 전부 동원해 돌진하였다. 그의 솔선수범했던 지휘 스타일을 잘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적은 바람에 풀잎이 쓰러지듯 하였다. 이때 적 1명이 숲 속에 숨어 최영을 쏘아서 입술을 맞혔다. 최영은 유혈이 낭자하였으나 안색은 태연자약하였다. 곧이어 최영은 그 적을 쏘니 시위 소리와 함께 적이 거꾸러졌다. 그런 후에야 맞은 화살을 뽑았다. 최영은 더욱 용감히 싸워 마침내 적을 거의 모두 대파해 포로로 잡거나 살육하였다. 그의 용맹성과 대담성은 이러하였다. 판사 박승길(朴承吉)을 보내 승리를 보고하였더니 우왕이 대단히 기뻐해 박승길에게 은 50냥을 주고 삼사우사(三司右使) 석문성(石文成)을 보내 최영에게 의복과 술 및 안마(鞍馬)를 주었다. 또 의사 어백상(魚伯詳)을 시켜 약을 가지고 가서 상처를 치료하게 하였다. 최영이 개선하자 우왕은 재추(宰樞·재상급에 속하는 고위관료)들에게 명령해 교외에서 맞이하게 하였는데 맞이하는 의식이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때와 비슷하였다. 궁중에 들어가 우왕을 알현하니 왕이 주연을 베풀고 묻기를 “적의 수효가 얼마던가?”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그 수효를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다. 또 여러 재상들이 물으니 “적이 만일 많았더라면 이 늙은이는 살지 못하였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겸손의 표현이었다. 우왕은 그의 공로를 인정해 시중(侍中·지금의 국무총리)으로 임명하려 하였다. 그러나 최영은 굳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시중이 되면 제때에 전선으로 나갈 수 없을 것인바 왜적을 평정한 연후라면 좋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이를 철회하고 철원부원군(鐵原府院君)을 봉하는 정도에 그쳤다. 권력을 탐닉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 왕도 감동했으리라. 이때의 전투를 그림으로 그린 ‘홍산파진도(鴻山破陣圖)’도 있었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대신 부여 홍산에는 이를 기념하기 위한 홍산대첩비가 그의 위용을 전해주고 있을 뿐이다. 대전대학교 인문예술대학 학장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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