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김갑동 교수의 대전충청 역사문화 다시보기-최영과 홍산대첩

럭키홍 2010. 8. 18. 15:28

 

 

김갑동 교수의 대전충청 역사문화 다시보기-최영과 홍산대첩

"비록 몸 늙었으나 구국 일념 뿐" 진두지휘
▲홍산대첩비

최영과 홍산대첩

고려는 그 말기에 이르러 왜구의 침략에 시달리게 되었다. 왜구(倭寇)란 말은 원래 ‘왜(倭)가 노략질하다(寇)’라는 말에서 온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후대에는 명사로 굳어져 고려말기에 노략질하던 왜의 집단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실제 ‘고려사’에는 왜구와 함께 ‘왜적(倭賊)’ ‘왜노(倭奴)’ ‘해적(海賊)’ ‘해도(海盜)’ 등의 표현으로 되어 있다.

이들의 침입은 이미 고려 중기부터 있었다. 그러다가 충정왕 2년(1350)부터 왜구의 침입이 본격화되었다. 즉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그해에 “왜구가 고성(固成)·죽림(竹林)·거제(巨濟)·합포(合浦)에 들어오자 천호(千戶) 최선(崔禪)·도령(都領) 양관(梁琯) 등이 싸워 이를 쳐부수고 삼백여 명을 죽였다. 왜구(倭寇)의 침입(侵入)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라고 되어 있는 것이다.

이후 충정왕 2년만 해도 2월의 침입을 시작으로 4월과 5월·6월·11월 등 계속적인 침략이 있었다. 이 침략으로 전라도의 순천·남원·구례·장흥 등지와 경상도의 동래군 등이 피해를 입었다. 이 때문에 전라도 진도에서는 백성들이 두려워 살지 못하게 됨으로써 현을 내륙으로 옮기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들 왜구는 공민왕대에 들어오면서 더욱 기승을 부렸다. 공민왕 원년(1353) 왜선 50여 척이 합포(合浦 ·경남 마산)를 침략한 것을 필두로 하여 동왕 4년(1356) 왜구가 전라도의 조운선 200여 척을 노략질하기도 하였다. 동왕 6년(1357)에는 왜(倭)가 강화도의 교동(喬桐)까지 침략하였다. 그러나 방어 임무를 맡았던 이운목(李云牧)·이몽고대(李蒙古大)가 겁내어 싸우지 아니하니 왕은 명을 내려 순군(巡軍)에 가두었다. 그리고 경성(京城 ·개성) 일대에 계엄령을 내리기까지 했다. 이제 왜구는 고려의 서울인 개성 근처까지 횡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왜구의 창궐은 우왕대(禑王代 ·1375-1388)에 와서 더욱 극심하였다. 우왕 원년부터 14년까지의 재위기간 동안에 왜구의 침입이 370여 회나 되었던 것이다. 이 왜구는 충청도 지역에도 출몰하였다. 우왕 2년(1376) 왜가 부여에 침입하여 노략질하다가 공주에까지 이르렀다. 목사(牧使) 김사혁(金斯革)이 정현(鼎峴)에서 싸우다가 패전하여 왜적이 드디어 공주를 함락하였다. 양광도 원수(楊廣道元帥) 박인계(朴仁桂)는 공주의 속현(屬縣)인 회덕의 감무(監務) 서천부(徐天富)가 구원하러 나가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그를 목베었다. 왜적이 또 석성(石城 ·부여군 석성면)에 침입하여 노략질하고 태조 왕건의 영정을 모셔놓은 연산현(連山縣 ·충남 논산군 연산면) 개태사를 공격하였다. 그러자 최영(崔瑩)이 이들의 토벌을 자청하고 나섰다. 그리고 왜구를 부여 홍산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홍산대첩(鴻山大捷)이었다.

최영은 충숙왕 3년(1316) 사헌규정(司憲糾正·종6품) 최원직(崔元直)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낸 철원최씨 가문출신이었다. 젊은 시절 그는 아버지가 죽으면서 남긴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유훈을 가슴에 깊이 되새기면서 생활하였다 한다.

우왕 원년(1375) 판삼사사(判三司事·종1품)에 오른 최영은 극심해진 왜구들의 침략을 격퇴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바로 현재의 부여군 홍산면에서 있었던 홍산(鴻山)전투였던 것이다.

당시의 상황을 ‘고려사’를 근거로 보면 다음과 같다. 왜적이 연산 개태사를 도륙하였는데 원수(元帥) 박인계(朴仁桂)는 싸우다 패배해 전사하였다. 최영이 이것을 듣고 토벌을 자청하니 신우는 최영이 늙었다 하여 만류하였다. 최영이 말하기를 “보잘 것 없는 왜적이 이와 같이 난폭하니 이제 그를 제압하지 않으면 후에는 더욱 대처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또 만일 다른 장수를 보내면 확실한 승리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며 그 휘하 군사도 평소에 훈련이 없으니 쓸 수 없습니다. 저는 비록 몸은 늙었으나 뜻은 꺾이지 않아 종묘와 국가를 편히 하고 왕실을 보위하려는 일념 뿐입니다. 곧 휘하를 인솔하고 나가 싸우게 하여 주기 바랍니다.”라고 재삼 요구하였으므로 우왕이 허락하였다. 국가에 대한 충성과 구국의 일념으로 충만해 있었음을 일 수 있다.

이리하여 최영은 밤낮으로 행군하였다. 이때 왜적은 늙은이와 약한 자를 배에 싣고 곧 돌아 가려는 듯한 연막전술을 펼쳤다. 그리고는 몰래 용감한 정예 부대 수백 명을 내지로 깊이 침입시켜 약탈하니 가는 곳마다 수수 방관할 뿐이고 감히 대적하는 자가 없었다. 홍산(鴻山)에 이르러서 함부로 살육과 약탈을 감행하여 기세가 대단히 강성하였다. 최영은 양광도 도순문사 최공철(崔公哲), 조전원수(助戰元帥) 강영(康永), 병마사 박수년(朴壽年) 등과 함께 급히 홍산(鴻山)으로 가서 전투에 앞서 우선 요해처에 의거하였다. 그 곳은 3면이 다 절벽이고 오직 길 하나가 통할 뿐이었다. 모든 장수들이 겁을 먹고 전진하지 못하였으므로 최영이 몸소 사병의 선두에 서서 정예군을 전부 동원해 돌진하였다. 그의 솔선수범했던 지휘 스타일을 잘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적은 바람에 풀잎이 쓰러지듯 하였다. 이때 적 1명이 숲 속에 숨어 최영을 쏘아서 입술을 맞혔다. 최영은 유혈이 낭자하였으나 안색은 태연자약하였다. 곧이어 최영은 그 적을 쏘니 시위 소리와 함께 적이 거꾸러졌다. 그런 후에야 맞은 화살을 뽑았다. 최영은 더욱 용감히 싸워 마침내 적을 거의 모두 대파해 포로로 잡거나 살육하였다. 그의 용맹성과 대담성은 이러하였다.

판사 박승길(朴承吉)을 보내 승리를 보고하였더니 우왕이 대단히 기뻐해 박승길에게 은 50냥을 주고 삼사우사(三司右使) 석문성(石文成)을 보내 최영에게 의복과 술 및 안마(鞍馬)를 주었다. 또 의사 어백상(魚伯詳)을 시켜 약을 가지고 가서 상처를 치료하게 하였다. 최영이 개선하자 우왕은 재추(宰樞·재상급에 속하는 고위관료)들에게 명령해 교외에서 맞이하게 하였는데 맞이하는 의식이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때와 비슷하였다.

궁중에 들어가 우왕을 알현하니 왕이 주연을 베풀고 묻기를 “적의 수효가 얼마던가?”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그 수효를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다. 또 여러 재상들이 물으니 “적이 만일 많았더라면 이 늙은이는 살지 못하였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겸손의 표현이었다.

우왕은 그의 공로를 인정해 시중(侍中·지금의 국무총리)으로 임명하려 하였다. 그러나 최영은 굳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시중이 되면 제때에 전선으로 나갈 수 없을 것인바 왜적을 평정한 연후라면 좋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이를 철회하고 철원부원군(鐵原府院君)을 봉하는 정도에 그쳤다. 권력을 탐닉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 왕도 감동했으리라.

이때의 전투를 그림으로 그린 ‘홍산파진도(鴻山破陣圖)’도 있었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대신 부여 홍산에는 이를 기념하기 위한 홍산대첩비가 그의 위용을 전해주고 있을 뿐이다.

대전대학교 인문예술대학 학장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최영장군묘<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 70-2번지>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는 요동정벌을 지휘한
최영 장군을 부정한 짓으로
재물을 모았다는 죄목으로 죽였습니다.

이에 최영 장군은 자신이 지금껏 살아오는동안에
부정한 짓을 했다면 무덤에 풀이 날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풀이 돋지 않을 거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래서인지 최영 장군의 묘에
아무리 좋은 흙을 덮고 금잔디 씨까지 뿌려도
잔디는 살아나지 않았답니다.


최영장군의 묘는 600년동안
풀이 돋지 않고 붉은 황토만 있다고 하여
'적묘' 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1976년부터 최영 장군의 묘에서
풀이 돋기 시작했습니다.
억울하게 죽은 최영 장군의 한이 풀린것일까??

 

.................................................................................................................................................

[이규원 객원전문기자의 대한민국 통맥풍수]<32>최영 장군 묘와 무당신
좌청룡 우백호 지세가 묘역 감싸고
600년 세월에 恨 풀린 듯 잔디 파릇
 ◇‘붉은 무덤’으로 알려진 최영 장군 묘. 600년 세월 속에 철천지한이 풀려서인지 풀과 떼가 잘 자라고 있다. 고려시대 묘제인 전형적인 사각묘다.
‘최영 장군 묘에는 정말 풀이 나지 않았을까.’ ‘떼를 입혔는데 처음에는 자라다가 나중에 말라 죽은 것일까.’ 어릴 적부터 이만저만 궁금한게 아니었다. 이런 의문과 관심은 어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여서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다.

작년 늦가을 혼자 묘역에 올랐다가 어스름 땅거미에 쫓겨 기겁하고 종종걸음을 친 적이 있다. 겨울에 가까운 해가 그토록 짧은 줄 깜빡 잊었던 것이다. 올봄에는 거봉 김혁규 회장(한국풍수지리중앙회)과 임원들이 동행하여 든든했다. 이렇게 두 번을 가보고서야 ‘역사적 의문’은 풀렸다. 최영(1316∼1388) 장군 묘에는 풀과 떼가 잘 자라고 있다.

◇뒤에서 본 아버지 동원부원군 최원직 묘(뒤쪽)와 함께 있는 장군 묘역. 회룡은산의 작국으로 안산이 혈처보다 높아 은둔하기에 좋은 곳이다.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 이르신 어버이 뜻을 받들어/ 한평생 나라 위해 바치셨으니/ 그 이름 빛나리라 최영 장군.

처음 이 노래를 배우면서 아버지 가르침에 따라 일평생 재물을 탐 안 내고 나라만 위하며 살다간 장군을 하늘같이 흠모했다. 최영은 회군하는 이성계군을 맞아 싸우다 체포돼 73세에 참형됐는데, 이때 생을 마감하며 “내가 탐욕한 마음이 있었다면 내 무덤 위에 풀이 날 것이고 그렇지 않았다면 풀도 나지 않을 것이다”고 유언했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 70-2번지. 경기도 기념물 제23호로 지정된 그의 묘를 찾아가는 길은 좀 험하다. 서울시립 장재장(벽제화장터)을 지나 통일로에 들어선 후 이정표를 따라 한참을 가다 보면 대자산 자락이 앞을 막아선다. 모든 차량은 이곳에서 멈춰서야 한다. 궁궐이나 종묘 앞에 서 있는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누구든지 이 앞을 지날 때 말에서 내리라는 뜻)’라고 쓴 ‘하마비(下馬碑)’는 없지만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차에서 내려 0.5㎞는 걸어야 한다. 낭만적인 이 오솔길도 최영 장군과 무당과의 접신(接神) 관계를 알고 나면 금방 등골이 오싹해지고 만다.

◇동원부원군 묘 앞의 고려 석비. 무당들의 촛불로 시커멓게 그을려 있다.

묘역에는 두 묘가 상하로 있는데 위쪽은 아버지 동원부원군 최원직이고 아래는 최영 장군과 부인의 합폄 묘다. 고려 말 우왕(재위 1375∼1388) 당시 문하시중과 팔도도통사로 권력의 최정상에 있을 때 골라 쓴 좋은 자리다. 자신의 첩 딸이 우왕에게 시집가 영비(寧妃)가 되었고 부원군(왕비의 친정아버지) 자리에 오르면서 모든 권력이 그의 손아귀에 있을 때다.

“장군의 묘에는 5·16 이전부터 풍수공부 한다고 찾아다녔습니다. 정말 그때만 해도 떼 한 장 살지 않는 붉은 황토 무덤이었어요. 상석, 비석, 문인석에는 촛농이 두껍게 쌓였었고 근처 나무마다 오색 헝겊이 덕지덕지 걸려 있어 대낮에도 으스스했습니다. 전국 각 곳의 무녀들이 찾아와 ‘최영 장군 신’을 받는다며 굿판을 벌인 때문입니다. 아마 그 때문에도 잔디가 못 살았을 겁니다.”

“이런 산국(山局)을 회룡은산(回龍隱山)이라 하는데 발복이 더딘 곳입니다. 대자산 중심맥은 양편으로 갈라섰고 구불구불한 지맥이 속살을 파고드는 형세잖아요. 용은 하늘로 머리를 두어야 승천하는데 땅속을 향했으니 후손들이 감응받기엔 세월이 좀 걸렸을 겁니다.”

최영 이후 동주 최씨는 조선왕조에 와 이렇다 할 벼슬길에 오른 후손이 없다. 태조 6년(1397) 무민공(武愍公)이란 시호를 내려 넋을 위로하고 제전답(祭田畓)과 함께 복권시켰으나 500년 동안 숨어 지냈다. 3·1운동 때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육당 최남선과 국무총리와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지낸 최두선이 형제간으로 동주 최씨다.

묘 좌향은 모두 자좌오향으로 정남쪽이다. 혈처 뒤에서 논둑처럼 솟아 내려오는 입수(入首) 용맥은 임(壬·북에서 서로 15도) 방향이니 좌(시신의 머리를 두는 곳)와 15도 차이밖에 안 나 거의 곧게 뻗은 내룡이다. 물길이 처음 보이는 입수(入水) 지점은 무덤 좌측의 갑(甲·동에서 북으로 15도) 방향이고 물이 빠져나가는 끝 파구는 미(未·남에서 서로 30도) 방향이어서 혈처를 감아 돌았다. 묘를 중심삼고 물길이 거의 반원을 그린 지형으로 부귀왕정한다는 자왕향(自旺向)이다. 간략하긴 하나 이렇게 용맥과 물길을 판단하는 것이 수국사대법이다.

◇묘 앞 전순의 돌계단과 안내표시판. 기록된 내용 일부가 사실과 다르다.

지관들은 누구나 입수(入首) 용맥을 중요시해 묘 자리를 잡을 때는 반드시 산등성이에 오른다. 이때 무를 심는 밭 두둑처럼 생긴 용맥이 내려오면서 좁아졌다 넓어졌다를 반복하면 길한 것이다. 중간중간에 큰 바위가 있어 기를 모았다가 풀어 주고는 혈처 위에 와 우뚝 멈춰서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자리다. 용맥이 굴절하는 것을 결인이라 하며 바위가 가로막는 것을 여기(餘氣·땅기운이 남아 뭉친 것)라 하여 길격 중의 최상으로 친다. 그러나 어느 명당혈처엘 가 보아도 이기(理氣)에 딱 맞아떨어지는 형기(形氣)를 갖춘 산은 찾아 보기가 힘들다. 이 또한 공평한 땅의 이치로 자연은 모든 것을 한 곳에 내주지 않는다.

최영은 역사적 공적이 두드러진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관한 자료는 의외로 허술하다. 가장 중요한 본관도 엇갈려 묘역 입구 안내판에는 동주(철원의 옛 지명) 최씨로 철원에서 태어났다고 기록해 놓았으나 다른 자료에는 창녕 최씨로 경기도 고양이 출생지라고 기술한 곳이 있다.

역사적 평가도 구구하다.

팔도도통사 최영의 주장대로 조민수·이성계 좌·우도통사가 위화도 회군을 않고 요동정벌에 나섰더라면 의당히 그 전쟁에 승리하여 우리 영토를 넓혔을 것처럼 비분강개하는 시각들도 있다. 하지만 사학계는 그 당시 국제정세를 그토록 녹록하게 보고 있지 않다. 고려가 종주국으로 섬기던 원나라(1271∼1368)는 이미 중원을 석권한 주원장에게 패해 북원(北元)으로 쫓겨간 뒤였고, 그 후 주원장이 건국한 명나라(1368∼1644)는 300년 가까이 대륙을 지배했다. 일부에서는 최영 측의 구파 군벌과 조민수·이성계의 신파 군벌 간 대립으로 보며 당시 고려 군사력으로는 요동정벌 자체가 무리였다고 분석하고 있다.

◇묘역에 오르는 오솔길의 낙엽. 무당들이 ‘최영장군 신’을 접신하러 가는 외통로로 혼자 걷기에는 섬뜩하다.

고려사 ‘최영열전’에는 군졸이 한 걸음만 물러서도 곧 목을 베었으며 그러기에 가는 곳마다 공을 세웠고 한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고 기록해 놓았다. 동 시대의 간대부(諫大夫) 윤소종이 “최영의 공은 한 나라를 덮었고 죄는 천하에 가득하다”고 평하자 세상에서는 이를 명언이라고 했다.

이 같은 무당의 접신 활동은 세습무(世襲巫)보다 강신무(降神巫) 쪽이 더 왕성하다. 접신 현상은 타고난 혈통과 무관하며 어느 날 갑자기 신의 계시를 받아 무당(여자 무당)이나 박수(남자 무당)가 되는 것이다. 이들은 무당들끼리만 혼인하는 무계혼(巫系婚 또는 동간혼·同間婚이라고도 함)으로 계보를 이어 간다.

세습무는 가계 혈통에 의해 사제권(司祭權)이 계승되는 직업 무당이다. 진도 씻김굿, 동해안 별신굿, 제주 영등굿, 서해안 대동굿 등 주로 해안선을 따라 집중되고 있으나 서울굿, 도당굿 등 내륙지방에도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굿판에 동원되는 무악(巫樂) 무가(巫歌) 무무(巫舞) 등은 모두 인간문화재로 지정돼 그 기능이 전수, 보존되고 있다.

최영 장군은 죽은 지 60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우리의 전통 민속문화 속에 시퍼렇게 살아 있다. 굿판에서 만나는 그의 위세와 잡신 장악 능력은 실로 놀랍다. 최영과 접신된 무당은 머리카락을 썰어 날려 버리는 예리한 작두 날 위에서 맨발로 훌훌 날며 춤을 춘다. 도대체 인간의 죽음과 무덤의 진실이 무엇인지 산행이 거듭될수록 미지의 영역으로 다가온다.

◇무덤 뒤에 솟아 있는 암석. 용맥이나 전순 안의 바위는 여기(餘氣)라 하여 상서롭게 여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