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력 이야기

대한민국 원전의 역사

럭키홍 2010. 10. 4. 16:59

 

 

우리나라 전원(電源) 역사에서 원자력을 뺀다면? 이 질문에 여반장으로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에너지와 직간접적으로 관련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러할 거에요. 아마 일부는 가장 성공한 에너지정책 중 하나라고 꼽을 것이고, 또 일부는 아예 도입하지 말았어야 할 기술로 치부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원자력을 쉽게 '없었어야 할 기술'로 치부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원자력 산업을 육성시킴으로써 석유 파동 위기에도 불구하고 경제성장과 산업성장의 발판을 마련해 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자력을 올바르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원자력이 그 동안 우리나라 경제와 산업에서 어떤 역할을 해 왔는지를 바르게 살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원자력이 한국의 근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우리와 함께 해 왔는지, 어떻게 가장 성공한 에너지 정책으로 부상하게 되어왔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돈도 기술도 없던 60년대 당시, 원자력은 선진국에서조차 쉽게 도입을 결정하지 못하던 신사업의 한 분야였습니다. 당연히 일각에서 무모하기 짝이 없는 허황한 도전이라고 폄하하며 고개를 가로젓기도 한 원자력을 국민 소득이 수 백 달러에도 못 미치는 우리나라가 도입할 수 있었던 것은 박정희라는 시대적 인물이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 원자력 1세대들의 입 모음입니다. '제 3의 불'로 불리며 막 세력 확장에 나선 원자력을 에너지원, 즉 전력 공급원으로 선택한 박정희 대통령의 결정은 결과론이지만 현재의 에너지/자원전쟁시대를 예견한 가히 "혜안적 선택"이었다는 것이 원자력계의 공통 견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지요. 특히 기후변화협약과 화석연료 고갈이 인류의 최대 과제의 하나로 떠오른 현실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원자력은 적어도 산업의 전력 공급원으로서 기대 이상의 효과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가장 기초적인 전기산업부터 방위 군수산업은 물론이고 의학, 식품, 레이저, 반도체 등 산업 전 분야를 아우르며 경제의 구석구석에서 산업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을 주도하며 제4세대 원전이나 원자력수소 개발 등 미래첨단기술 개발의 단초를 제공했음은 두말하면 잔소리일 것입니다.

 

만일 돈과 기술의 불모를 자인하고 스스로 발목을 붙들어 원자력 도입을 포기했다면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상상하기조차 어렵지만 아마도 석탄과 석유가 그 자리를 차지했을 것이고, 국민소득 2만 달러는 아직도 요원한 미래 목표로 남아있을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물론 급등하는 유가와 고갈되는 자원, 그리고 기후변화협약과 맞물린 환경문제에 무방비 상태로 놓여있을 수도 있겠지요.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말입니다.

 

 

 

 

2005년 8월 12일, 우리나라의 에너지 역사, 원자력 역사가 새로이 쓰였습니다. 1978년 4월 고리원자력 1호기 준공으로 세계 원자력 역사에 이름을 올린 이후 만 26년 4개월 만에 20번째 원전인 울진 5, 6호기가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고 황홀한 불꽃을 피워 올린 것입니다. 울진 5, 6호기의 가동으로 우리나라의 원전설비 총량은 1772만kW로 늘어나 세계 6위의 원자력 대국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울진 5,6호기는 국산기술이 오롯이 투영된 자체 브랜드인 한국표준형으로 건설돼 미국, 프랑스, 일본 등 세계 원전 사업을 주도하고 있는 주요 원전국들과 베트남, 인도네시아, 터키 등 원전에 목말라하는 국가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습니다.

 

 

 

사실 원전설비용량 세계 6위 등재는 전력 공급원의 역할로만 평가할 때 큰 의미를 부여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식민시대와 전쟁의 포연을 잠재우며 불과 반세기만에 경제규모 세계 12위, 국민소득 2만 달러 대에 진입할 정도로 기적적인 성장을 이끌어낸 동인으로서의 역할로 의미를 확장한다면 평가는 사뭇 달라집니다. 원자력 도입 시 박정희 대통령이 전력 공급원 외에 핵과 연계한 에너지의 안보적 측면과 국가적 위상 제고라는 대외적인 목적, 그리고 기술 산업화의 척후병으로서의 역할까지를 세세히 들여다보면 그 가치의 대단함을 용인할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원자력은 우리나라에 언제, 어떻게 들어왔을까요?

 

 

 

 

한국전쟁 전후 미국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우리나라는 자연스럽게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대한 국제적인 흐름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동참, 국제원자력기구가 설립되기도 전인 1955년에 미국과 원자력협력협정을 체결했습니다. 그러나 국민들의 염원과는 달리 협정 내용은 우리나라의 의도와는 크게 빗나갔습니다. 조정하는 과정에서 미국은 우리나라가 갖고 있는 원자력에 대한 군사적/산업적 요구를 거의 수용하지 않았따. 우리나라가 사용할 수 있는 원자로는 군사적 목적은 물론, 동력원으로서의 이용 가능성도 거의 없는 연구용 원자로였습니다. 어쨌든 우리 정부는 1956년 3월, 문교부 소속 기술교육국 내에 원자력과를 신설했고 또 1958년 2월에는 원자력관계법의 모법인 원자력법이 국회를 통화, 1959년 1월 최초로 원자력 전문부처인 원자력원을 정식 발족하였습니다. 특히 같은 해 3월에는 원자력 전문 연구기관인 원자력연구소가 설립돼 우리나라 최초의 연구용 원자로인 트리가 마크(TRIGA Mark) 2를 1962년 가동시키는 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당시 정부는 원자력 전문 연구진을 불러 모았고, 미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1세대 원자력공학자들이 국가의 부름을 받고 원자력연구소에 모여 제3의 불을 향한 원대한 목표에 집중했습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과 국민들은 원자력의 군사적 이용과 함께 극도로 파괴된 전력 공급문제를 해결하고, 동시에 산업부흥으로 연결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국내 최초 원자로 트리가 마크(TRIGA Mark) 2 기공식에 참석해 연구진의 손을 일일이 어루만지며 격려한 것은 그가 얼마나 절실히 원자력을 원했는지 읽을 수 있는 대목입니다. 원자력연구소 창설 멤버이자 국제원자력학회협의회 회장을 역임한 이창건 박사(78) "저 야생마 같은 핵반응 에너지를 제대로 길들여 재갈을 물리고, 안장을 얹으면 사람이 타고 다닐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도취돼 정신 나간 사람처럼 새벽하늘만 쳐다봤다"고 회상했습니다. 또 이 박사는 "종교인들이 깨달음으로 득도를 했다면, 나는 원자력을 공부하겠다고 마음 먹은 것을 득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며 "북한의 남침으로 울분을 삼켜야 했던 분위기 속에서 엄청난 파워를 가지고 있는 원자력을 국방은 물론 국가재건에 활용하려는 이승만 대통령의 관심은 대단했다"고 회고했습니다.

 

그러나 이때만 하더라도 원자력이 중추 전력 공급원의 역할을 할 것인지는 반신반의한 상태였습니다. 자본이 적게 드는 수력이 전력 공급원의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었고, 무연탄 개발이 본격화되기 시작하면서 질은 낮지만 양적으로 풍부한 석탄이 서민들의 주종 연료뿐 아니라 전력 공급원으로 이용될 수 밖에 없는 환경이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원자력을 동비할 수 밖에 없는 결정적인 사건이 터지게 되는데요, 그것은 바로 세계 경제를 강타했던 석유파동이었습니다. 1973년 세계가 석유파동에 휩싸이면서 원유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자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을 압박하여,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해 주종 에너지원으로 활용키로 작정하고 국력을 집중시키게 됩니다.

 

 

 

 

원자력 불모지였던 사업초기 정부는 모든 것을 전적으로 외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원자력발전 기술 자립 차원에서 전력사업자인 한국전력공사와 한국원자력연구소를 연계한 기술자립을 추진하기 시작해 제2연구용 원자로 트리가 마크(TRIGA Mark) 3를 도입, 한 단계 진보한 기술을 확보해 나갔습니다. 원자력을 주로 하고 석탄을 종속으로 삼은 원주종탄(原主從炭) 정책이 가능하게 된 것도 바로 이 시점입니다.

 

고리 1호기에 이어 우러성 1호기, 고리 2호기, 월성 2~4호기 등 원자력 발전소가 속속 준공되면서 우리나라 전력 공급의 중추적인 역할을 원자력이 담당하게 됐고 원전연료 국산화, 원자력발전 기술의 잘비, 다목적연구로 자력 설계/건설 사업이 추진돼 기술자립의 틀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또한 원자력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정부는 한국원자력연구소 내에 원자력안전센터를 설립했고, 1989년에는 이를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으로 독립법인화하면서 안전규제의 독립성을 확보한 것은 원자력의 안전성 확보 차원에서 대단한 의미를 부여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90년대 원자력계는 정치/사회적인 민주화에 따라 반원전 활동이 기지개를 켜면서 님비(Nimby)라는 지역이기주의 현상이 나타났고, 국민들의 권리의식 신장 등으로 건설 뿐 아니라 발전소 운영에도 적지 않은 마찰을 야기해 급기야 원자력발전소에서 발생되는 방사선폐기물 처분시설 부지 마련 사업이 무려 20년 제자리걸음을 하게 만드는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2005년 사용후핵연료와 분리시키고 주민투표를 거친 후에야 일단락됐지만 후유증은 아직도 남아있는 상황입니다.

 

 

 

 

약 30년의 우리나라 원전 건설사는 기술자립의 무에서 유를 창조한 역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초창기 아무런 기술과 경험 없이 시작된 원전건설은 미국과 프랑스 등 선진국에 전적으로 의존해야만 하는 입장이었습니다. 따라서 정부는 원자력을 준국산에너지로 중추 전력원으로 활용키 위해서 기술자립의 목표를 세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나라 원자력산업을 단계로 나누면 고리 1~2호기, 월성 1호기를 기술의존기(1955~1983)로 볼 수 있고, 고리 3~4호기, 영광 1~2호기, 울진 1~2호기를 기술축적기(1983~1989), 그리고 영광 3~4호기, 월성 2~4호기, 울진 3~4호기를 기술자립기(1989~1999)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이후는 기술성숙기(1999~)로 원자력산업의 수출사업화가 가능해진 시기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원전을 오롯이 수출해 본 경험은 없습니다. 원자로와 증기발생기 등 원전설비와 설계기술에 대한 인력수출이 전부이지요.

 

이유는 너무나 잘 알다시피 원천기술이 없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완벽한 국산화가 이뤄지지 않아 기술전수를 해 줄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고 길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고, 이미 그 길도 뚫어 놓았습니다. 우리나라에 원천기술을 이전해 준 국가와 손을 잡는 것이 바로 그 길입니다. 여기에 아직 자립하지 못한 3대 원천기술(핵심설계코드, 원자로 냉각제펌프, 제어계측장치)도 2012년까지 국산화되면 그야말로 우리나라 에너지 미래는 거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출처: 원자력문화재단 소식지 [원자력문화] 2009.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