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기즈칸이 전쟁터에서 보석을 뿌린 까닭은? ----------------------------------------
13세기 칭기즈칸이 정복한 지역은 현재의 북아메리카와 중앙아메리카를 합친 것보다 더 넓다. 놀라운 사실은 당시 몽골 군대가 불과 10만 명이었으며, 이 모든 정복 활동이 25년 만에 이뤄졌다는 점이다. 이런 업적에 비해 칭기즈칸의 성공 비결을 밝히려는 노력은 너무나 미약했다. 특히 서구인들은 그를 무서운 정복자 정도로만 평가했다. 미국의 인류학자 잭 웨더포드는 8년간 몽골을 직접 답사하며 칭기즈칸의 생애와 몽골이 인류 역사에 미친 영향을 연구했다. 웨더포드는 칭기즈칸의 최대 성공 비결을 ‘위대한 전략’이 아니라 ‘신속하고 실용적인 실행’으로 꼽았다. 칭기즈칸은 명예보다 철저하게 실리를 우선했다. 그는 정면 승부를 고집하지 않았고, 어떨 때는 일부러 도망치면서 귀중품들을 땅에 떨어뜨렸다. 귀중품을 줍기 위해 전열이 흐트러진 적군을 공격하기 위해서였다. 싸움에서 명예를 찾지 않고, 이기는 것에서 명예를 찾은 인물이 칭기즈칸이다. 몽골은 이렇다 할 자체 과학 기술과 무기 체계가 거의 없었지만 정복지의 과학, 문화, 인재, 종교까지 받아들였다. 외부의 자원을 편견 없이 활용한 셈이다. 칭기즈칸은 탕구트와 싸울 때 중국의 투석기를 처음 접했다. 그는 중국인 기술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즉시 이들에게 큰 상을 내걸었다. 몽골군 안에 기술 개발 부서도 신설해 투석기의 성능을 향상시켰다. 이후 방어전의 핵심이던 두꺼운 성벽은 칭기즈칸에게 아무런 위협을 주지 못했다. 그는 어떤 나라나 부족을 점령한 후 바로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않았다. 그 지역의 물자와 인력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안정화한 후에야 다른 지역으로 진출했다. 그는 세계를 지배하려 하지 않았다. 그때그때 필요한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것이 세계 정복이라는 결과로 나타났을 뿐이다.
자료:동아일보 김 정 수 베인&컴퍼니 이사 |
'역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귀신 잡는 해병의 유래 (0) | 2011.08.10 |
---|---|
쌀값 6배 오를 때 등록금은 30배 뛰었다 (0) | 2011.06.15 |
행정중심복합도시가 세종시로 된이유 (0) | 2011.05.25 |
독도의 역사 재인식 (0) | 2011.05.04 |
역사란 무엇인가? (0) | 2011.03.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