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애 류성룡의 리더십
책만 파고든 선비? 왜란한 가운데서 조선군 지휘한 '멀티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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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은 인재를 분별하는 식견에서도 탁월했다. 전쟁이 일어나기 1년여 전인 1591년 1월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이 일본에서 돌아왔다. 왕은 이들의 보고를 듣자마자 우의정 류성룡에게 이조판서의 권한을 겸하도록 하는 특별 조치를 내렸다. 류성룡이 이순신과 권율을 발탁한 것이 바로 이때였다. 그는 경상도의 방어가 중요하다고 생각해 나이가 많은 경상도 우병사 조대곤을 당대 최고의 명장으로 알려진 이일로 교체할 것을 건의했다. 이 천거는 병조판서가 명장은 서울에 있어야 한다고 고집해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그는 전쟁 후에 지은 '징비록'에서 이를 못내 안타까워했다. 그의 주장이 관철되었더라면 전란 초기의 관군 참패의 역사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전략·전술가로서도 탁월하였다. 평양을 점령한 일본군은 평안도 주민들을 매수해 간첩으로 삼았다. 명군의 첫 평양 공격 실패도 이들의 정보 제공에 원인이 있었다. 이 사실을 안 류성룡은 일벌백계로 다스려 2차 공격을 성공시켰다. 평양성을 탈환한 후 그는 조선군에게 후퇴하는 일본군에 대한 강력한 추격전을 명령하였다. 그리고 개성에 당도해서는 명군 장수들에게 서울 수복을 위한 수륙 양면 공격을 제안했다. 즉 명군 주력의 일부를 해로로 한강에 직접 투입해 강의 남안을 장악,일본군의 퇴로를 남,북한강 쪽으로만 허용해 충주에 이르는 긴 협곡에서 격멸 작전을 벌이자는 것이었다. 이는 한국전쟁 때의 인천 상륙작전을 방불케 하는 것으로,당시 명나라 장수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그러나 명군 총사령관 이여송이 수용하지 않아 끝내 실현을 보지 못했다.
명군은 또 임진강이 반만 결빙된 상태를 보고 진군 속도를 늦추려 하였다. 류성룡은 산에서 칡넝쿨을 거두어 대형 부교를 만드는 일을 직접 지휘해 5만의 대군을 안전하게 도강시켰다.
류성룡의 임기응변으로 임진강을 건넌 명군은 벽제관에서 일본군에게 대패했다. 이 싸움을 지휘한 이여송은 개성으로 후퇴해 평양으로 되돌아가려하기까지 하였다. 도체찰사 류성룡은 동파(현 판문점)에 도체찰사부를 설치하고 이여송과 기 싸움을 벌였다. 그는 이곳에서 경기 일원의 조선군을 지휘하면서 서울 수복의 전투력을 키웠다. 이때 야전 막사의 풀더미 위에서 기침하면서 업무에 열중해 입은 옷이 풀색이 되는 것도 몰랐다. 서울 수복 후에는 아픈 몸을 마상에 싣고 영남까지 왕래하다 실신 상태가 되기까지 했다.
임진왜란은 1490년께부터 시작된 소빙기(little ice age) 대자연재난의 한가운데 있었다. 대기권에 쌓인 우주먼지가 태양의 빛과 열을 차단해 일어난 재난이었다. 대기권의 기류,기상의 이변은 농사를 망치고 병충해와 전염병의 만연을 가져와 많은 굶주림과 아사자를 낳았다. 조선처럼 농민이 곧 군사가 되는 제도를 가진 나라에서 농민의 굶주림은 국방력에 치명적 타격을 주었다. 전란 초기 조선 관군의 참패는 바로 여기에 원인이 있었다. 류성룡은 농민을 살려야 전국적 방어조직이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진휼 차원의 경제정책을 펴는데도 힘을 기울였다. 둔전 경영 외에 염업,광업,수공업,상업 등 백성의 생계에 도움이 되는 것은 모두 지원하였다. 바닷가 사람들은 소금을 구워 내륙 사람들과 교역해 서로 생계에 보탬이 되도록 했다. 교역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은 중강진의 국제교역시 개설로까지 이어졌다. 서울 수복 후 경기 이북 지역에 집중적으로 기울여진 이런 노력의 성과는 정유재란 때 일본군의 북상을 저지하는 힘이 되었다. 정유재란 때 한강변에서 조선군을 열병하던 국왕은 "군사의 위용이 이 정도가 된 것은 오로지 경의 힘이라"고 크게 칭찬하였다.
서애 류성룡은 멀티펑셔널형 리더였다. 사세를 다변적으로 파악해 맥을 잡은 다음 임기응변과 근본치유를 병행해 파국에서 벗어나는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그는 우의정으로 인사권을 부여받은 때로부터 7년10개월간 전시국면 타개라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다. 이 책무에 혼신의 힘을 쏟았던 만큼 전란의 복기(復碁)라고 할 '징비록'저술도 어렵지 않게 해냈다. 이 책이 1695년 일본에서 처음 번역돼 나왔을 때,저명 유학자 가이바라 에키켄은 서문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출병'은 하늘의 법도를 어긴 것이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평했다. 가이바라는 도요토미와 류성룡의 대결에 대한 판정에서 류성룡의 손을 들어주었다. 백성 살리기에서 출발한 그의 위기 대처는 하늘의 뜻에 부합하는 것이자 리더십의 영원한 본보기였다.
이태진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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