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은 신문을 펼쳐 들기가 두려울 정도다 . 온통 우울하고 희망없는 뉴스로 가득 메워져
있기 때문이다. 정치, 경제, 사회 할 것 없이 뭐하나 제대로 풀리는 것이 없고, 꽉막힌 동굴안
같이 답답하기만 하다.
작년 후반기 미국발 금융위기로부터 밀어 닥친 글로벌 경제 위기는 전 세계 경제를 곤두박질 치며 끝이 어딘지 모르게 추락하고 있다
그여파로 세계시장을 누비며 수출을 하여 먹고 사는 우리나라는 글로벌 위기 앞에 맥을 못추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지난 해 사상 최대의 수주금액을 기록하면서 우리경제에 효자 노릇을 톡톡히 했던 해외건설이 올해들어서는 수주전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고 한다. 글로벌 신용경색으로 인한 돈가뭄 현상으로 중동의 발주처들이 자금사정이 나빠 져 공사 금액을 줄이기 위해 사업 발주 시기를 계속 늦추는게 주 요인이라 한다.
해외 건설 협회에 따르면 1월달 국내 건설사들은 해외에서 총 37억 5972만 달러어치의 사업을 수주했는데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 수주액(총 53억 2521만 달러)의 70% 수준이라 한다.
이와같이 실물경제가 추락하며 모두가 어렵다고 하는 현재의 경제상황을 보고 경제 19단이라던 고 정주영 회장이 살아 있다면 그는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이 어려움을 헤쳐 나가기 위해 어떤 방책을 내 놓았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되어 나는 이글을 쓰며 그분을 생각해 본다.
우리 나라의 해외건설 공사 수주는 1947년 정주영 회장이 창립한 현대건설이 시초일 것이다. 그는 자동차 수리 공장을 하다가 조금 나은 것이 없을까 ? 하는 생각중에 그가 어느날 자동차 수리공장을 할 당시 서울시에 수금을 하러갔다가 건설업자들이 건설비를 받아가는 것을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한다.
"똑같은 시간과 인력을 투입해서 하는 일인데, 우리는 기껏 30~40만원 받아가고,건설업자는 1천만원 받아가는게 말이 되는냐? 우리도 건설업을 해야겠다" 하는 생각에서 당시만 해도 모두가 안된다하고 반대 했던 것을 정주영 회장 혼자만 우겨서 자동차 수리공장에 "현대토건사" 라는 간판 하나를 더 달은 것이 현대 건설의 모태가 되었다고 한다.
1960년대 중반 현대 건설은 우리나라 최초로 해외 건설 공사에 나가면서 태국의 파타니 나리타왓 고속도로 공사를 시작으로 베트남 캄란 소도시 공사 , 사우디 아라비아 주베일 항만 공사 등등의 해외 공사들을 수주하여 해외에서 활발하게 공사를 해나갔다.
그 당시 사우디 아라비아 주베일 공사에는 미국, 영국, 서독 프랑스, 네널란드등 해외 유수의 건설업체 9개사들이 입찰 초청을 받았고 현대건설은 10개의 자리중 마지막 번째로 입찰하게된 정주영 회장은 이 공사를 기필코 성사시키고자 치밀한 전략을 세워 추진한 끝에 입찰금액 12억 달러로 가정하고 25% 이상 할인한 가격인 9억 3천만 달러를 제시한 현대건설에 낙찰 되었다 .
이공사 금액은 1976년 당시 환율로 약 4600억원으로 그해 우리 나라 예산의 50%에 해당되는 엄청난 액수였다. 선수금으로 7억달러가 들어온 것을 보고 외한 은행장이 "건국이래 최고의 외환보유고를 기록하게 되었다" 고 그에게 노고를 치하하는 전보를 보냈다는 사실에서도 그당시의 사정을 짐작 할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금액은 그 당시 세계 최고였던 울산조선소의 10배가 넘는 막대한 공사비 였고 공사비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다는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사우디의 공사 발주처와 감독청에서는 '현대가 과연 이문제를 플수 있을지' 반신 반의 하고 있었고,입찰경쟁에서 탈락한 경쟁사들에서도 시기와 반복이 이어져 그들은 ' 현대가 무모한 객기를 부리다 사우디 앞바다에서 침몰할 것이다'는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고 한다.
이때 정주영회장은 경제 19단이라는 저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그가 보여준 결단력과 모험심, 창조적 도전 정신은 지금도 우리에게 잊혀지지 않는다.
그는 우선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서 모든 자재를 울산에서 제작하여 그자재를 바지선으로 운반하기로 결정했다. 10층 빌딩만한 철물 구조물 89개를 바지선에 싣고 모두 30회나 그 유명한 필리피의 태풍권을 지나 인도양을 거쳐 현지까지 수송하면서 두번 태풍을 만나 가벼운 사고외에는 큰 사고 없이 수송을 완료함으로써 비용을 절감하고 막대한 이윤을 창출한 일이나, 중량 500톤짜리 자켓을 한치의 오차없이 20m 간격으로 해안선에서 12Km떨어진 수심 30m 바다 한복판에 파도에 흔들리면서 정확히 박아 넣는 일들 모두가 상상을 초월한 험난한 공사 였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외국의 기술자들이 경악을 할 정도로 담대한 결단력과 신념으로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이 험난한 공사를 계약기간보다 8개월 단축한 36개월만에 성공리에 끝마치게 되었다.
이공사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그당시 세계적 건설사였던 삼릉중공업의 고까 회장은 "내 평생에 이러한 최대 규모의 공사는 전대미문이며 이러한 큰공사를 목격한 일도 처음이다. 이것은 20세기 최대의 대역사이다" 라고 감탄했다고 한다.
이 주베일 항만공사를 하면서 사우디와 외국 기술자들은 정주영 회장의 불굴의 추진력과 창의적인 아이디어, 마지막으로 우리 근로자들의 근면성에 크게 놀랐다고 하고 그가 아니면 할수 없는 '창조의 신화' 라 할만큼 대역사를 이룬 것이라는 감탄의 말을 했다 한다.
이 공사의 성공으로 인해 현대 건설은 조직력과 시공능력을 인정받아 일약 세계적인 건설공사로 우뚝 서게 되었다 .
이 뿐만아니라 정주영 회장의 업적은 경제19단의 수준을 넘어 신적인 경지로써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에게는 존경과 감탄을 자아내는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시대와 공간을 달리하지만 휴전협정이 조인된 1953년 대구~거창간 고령교 복구공사를 따냈다. 공기 26개월, 총 공사비 5478만환에 따낸 이 공사는 당시 정부 발주 공사로는 최대 규모였다. 그러나 극심한 낙동강의 수심 차이에다 장비 부족, 잦은 홍수 등으로 공사는 도무지 진척이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물가마저 폭등했다. 착공 당시 책정한 설계상의 기름 단가가 700환이었지만 공사가 끝날 무렵에는 4500환으로 뛰었다.
집이며 계열사 장비며 모든 자산을 팔아 공사비에 대느라 가족들이 모두 거리에 나앉게 됐다. 하지만 그는 중도 포기하자는 일부 측근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기업 하는 사람은 신용이 생명’이라며 끝까지 맡은 공사를 진행했다. 결국 그는 총 7000만환의 막대한 적자를 보고서야 완공할 수 있었다. 신용을 지키려 애쓴 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현대는 고령교 공사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 이후 발주되는 정부공사들을 잇따라 수주하며 도약하게 됐다. 정주영은 특히 고령교 공사를 통해 ‘맨손으로는 호랑이를 때려잡지 못하고, 걸어서는 황하를 건너지 못한다(不敢暴虎 不敢憑河)’는 시경(詩經)의 교훈도 체득했다. 어떤 사업이든 충분한 장비와 정교한 플랜 없이 막무가내로 도전만 해서는 성공하지는 못한다는 교훈을 얻는 쓰라린 경험을 하면서도 그는 늘 ' 시련은 있었도 실패는 없다' 는 생각으로 또 다른 사업들에 도전하게 된다.
강원도 통천에서 소학교만 졸업고 소판돈 70전을 들고 서울로 내려와 쌀가게 사업으로 시작해 6·25전쟁 통에서도 현대자동차공업사 등으로 도약해 1976년 국산자동차 1호인 포니 자동차를 해외에 처음 수출했던 일화나, 경부고속도로 옥천과 영동구간의 당제터널 공사, 소양강 다목적댐을 콘크리트 댐이아닌 사력댐으로 성공시킨일, 현재도 가끔 TV 광고에서 볼수 있는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 하나로 영국에서 현대중공업 창업 자금을 빌린 일화나 서산간척사업에서의 물막이 공사를 하기위해 고 정주영 회장만이 생각 해 낼 수 있는 일명 정주영 공법이라는 유조선 공법 적용, 소떼 몰이로 시작한 금강산 관광 개발사업, 1981년 9월 독일 바덴 바덴에서 1988년 서울올림픽을 위치한일 듣등의 그가 남긴 수 많은 업적에는 그만이 갖고 있는 불굴의 의지와 신념,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도전 정신, 담대한 결단력, 천부적인 부지런함과 신용제일주의 , 창조적인 아이디어, 불도저 같은 추진력 등등이 요즈음 같이 어려운 시기에 기업을 경영 하는 기업인들이나 21세기를 사는 모든 이들에게 요구되는 삶의 정신 자세요 인생의 소중한 지표가 될것이다. 라는 생각을 나는 해 보게 된다.
진정한 기업가는 항상 새로운일 ,큰 일을 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을것이다. "작은 것'보다 '큰것'을 쫏는 사업방식에 대해 일부사람들은 '무모한 짓' 이라 생각하겠지만 바로 이러한 헌신적 위험 부담이야말로 정주영회장의 기업경영과정을 볼 때 진정한 기업가 정신의 주축이라 하지 않을 수 없고 기업을 일으켜 세우는 과정에서 노동자와 같은 땀과 열정과 수많은 시련과 도전만이 기업가에겐 존재 할 뿐이라는 것과 시류에 따라 권력이나 정치인의 요구에 어느정도 좌우 될지 몰라도 원칙을 벗어난 기업경영은 있을 수 없고 신용,정직, 성실이라는 가치를 통해 기업가는 부가가치를 창출해야 한다는 것이고 여기에 정주영 회장이 있었다는 것을 느끼게 되니 그분이 그리울 뿐이다.
현재의 세계적인 경제 불황으로 우리 살림살이가 어렵고, 정치가 어지럽고 사회는 희망섞인 일들이 안 보이는 요즈음 창조적이고 도전적인 고 정주영 회장의 경륜과 식견 그리고 강한 추진력이 돋보이는 것은 나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또한 그분이 살아 있다면 그는 과연 오늘의 경제적 난국 앞에 또다른 무엇을 제시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그분이 그리워지는 요즈음 이다.
'독서 사랑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나리자 미소의 법칙 (0) | 2010.04.09 |
---|---|
올해의 읽을 만한 책 (0) | 2009.12.23 |
CEO 칭기스칸-유목민에게 배우는 21세기 경영 전략 (0) | 2009.01.27 |
"무지개 원리"를 읽고 나서 (0) | 2009.01.11 |
유목민의 이야기 (0) | 2009.01.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