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김갑동 교수의 대전충청 역사문화 다시보기]- 고려 멸망과 목은 이색

럭키홍 2010. 9. 1. 14:33

   
[김갑동 교수의 대전충청 역사문화 다시보기]고려 멸망과 목은 이색
높은 학식·곧은 절개… 역사 속에 영원히 남아
▲목은 이색 영정

충남 서천에 가면 한산면이 있다. ‘한산(韓山)’하면 생각나는 것은 바로 ‘모시’다. 그 섬세하고 하얀 모시의 품격은 비단에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소위 ‘앉은뱅이 술’이라 일컬어지는 한산 소곡주를 떠올릴 것이다. 소곡주는 원래 백제 왕실에서 즐겨 마시던 술로 백제가 멸망하가 그 유민들이 이 술을 마시며 망국의 한을 달랬다 한다. 그러나 소곡주 외에도 한산에는 고려의 멸망 과정에서 많은 한을 간직한 목은(牧隱) 이색(李穡)이란 유명한 인물이 있었다.

그는 한산 이씨로 1328년(충숙왕 15년) 외가인 경북 영해(지금의 연일)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가정(稼亭) 이곡(李穀)이었다. 이곡은 이제현의 문인으로 원 나라의 과거 시험에 합격하여 그 곳에서 벼슬 생활을 하였던 인물이다. 그러나 당시 고려가 원 나라에 바치는 공녀(貢女)의 실상을 보고 이의 중지를 건의하여 수락받은 바도 있었다.

외가에서 태어난 이색은 두 살 때 부모를 따라 고향인 한산으로 돌아왔다. 여섯 살 때 아버지 이곡이 원 나라에 건너갔으므로 그는 주로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으며 자랐다. 그는 8세 때부터 산중의 여러 절을 다니며 공부했다. 처음에는 고향인 한산의 숭정산에서 공부했고 이어 14세 때에는 강화도 교동의 화개산에서 공부한 후 16세 때에는 개경에 들어와 최충이 창건한 구재학당(九齋學堂 : 학문에 따라 9개의 반으로 나누어 배우던 사설학원)에 들어가 공부했다. 당시 그는 각촉부시(刻燭賦詩)에서 번번이 1등을 차지했다. 각촉부시란 초에 금을 그어놓고 촛불이 그 금에 타들어갈 때 까지 시를 지어 바치고 이를 평가하여 등수를 매기는 일종의 시짓기 대회였다. 이 대회에서 첫해에는 1등을 4,5회 했고 다음 해에는 20여 회나 1등을 했다고 그는 자술하고 있다.


19세 때에 성균관에서 주재하는 시험에 1등으로 합격하고 안동 권씨 권중달의 딸과 혼인했다. 21세 때에는 원 나라로 유학의 길을 떠났다. 그가 유학길에 오른 것은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아버지 이곡의 권유가 가장 컸던 것 같다. 이곡은 아들 이색에게 일찍이 학문을 권하는 시를 보낸 바 있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씌여 있었다. 사내로 태어난 보람은 제왕이 있는 서울에서 벼슬하는 것이지만/ 나라에 몸 바침은 고생없이는 안되는 것이라/ 공자는 태산에 올라 천하를 작다 했으니/ 큰 곳과 높은 곳에 몸을 두었으면 좋겠다. 이 시로 미루어 볼 때 남자는 큰 물에서 놀아야 한다는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원나라에서 국립대학에 해당하는 국자감의 생원이 되었다. 거기서 중국의 역사책과 유교 경전을 읽으면서 학문적 식견을 넓히고 정이와 주자의 성리학에 심취하기도 했다. 이때 잠시 고려에 들렀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 역시 돌아와 3년상을 치르게 됐다. 상중에도 그는 당시 막 왕위에 올랐던 공민왕을 위해 시정개혁에 관한 몇 가지 상소를 올렸다. 토지제도의 개혁과 왜구에 대한 대책, 교육의 진흥, 불교 페단의 개혁 등이 그 골자였다.

26세 때인 공민왕 2년(1353) 그는 지방관이 주재하는 향시에 1등으로 합격하였고 또 원 나라가 설치한 정동행성에서 주관하는 시험에도 응시하여 1등을 했다. 그 즈음 고려 출신으로 황후의 자리에까지 오른 기황후(奇皇后)의 아들이 태자가 되어 그 책봉식이 있게 되었다. 이색은 이때 서장관(書狀官)의 자격으로 다시 원 나라에 가게 되었다. 얼마 후 원에서 그는 황제가 직접 주관하는 전시(殿試)에 2등으로 합격했다.

과거에 급제한 이색은 원의 관직을 받았으나 공민왕 3년(1354) 뜻한 바가 있어 고려로 귀국하였다. 공민왕은 그의 명성을 듣고 단번에 5품관에 해당하는 전리정랑 겸 예문검교(典理正郞 兼 藝文檢校) 벼슬을 주었다. 이후 그가 주로 봉직했던 관부는 춘추관과 예문관, 밀직사와 성균관이었다. 춘추관은 역사를 편찬하는 곳이고 예문관은 왕의 비서실과 같은 곳으로 왕의 교서나 외교 문서 등을 작성하는 곳이었다. 밀직사는 국왕을 호위하고 군정의 기밀을 장악한 기관이었으며 성균관은 유학 교육을 맡은 일종의 국립대학이었다. 이로 미루어 그의 학문적 식견과 공민왕의 총애를 엿볼 수 있다.

그는 온 정성을 다하여 공민왕을 보필했다. 그렇다 하여 그가 관직만을 탐한 것은 아니었다. 옳은 일일 때에는 왕의 비위를 거스리면서까지 몸을 사리지 않았다. 공민왕 14년(1365) 왕비였던 노국대장공주가 죽자 공민왕은 화려한 영전(影殿)을 짓고자 했다. 그가 직접 그린 노국공주의 초상을 안치하고자 함이었다. 그러자 당시 시중(侍中 : 국무총리에 해당)직에 있던 유탁이 이를 반대했다. 왕은 대노하여 그를 하옥하고 죽이려 하였다. 그러자 이색이 나서 이를 변호하여 석방케 한 적도 있었다.

47세 때인 1374년 공민왕이 비참하게 죽자 그도 충격을 받아 병이 들어 8년간이나 산과 강으로 요양을 다녀야 했다. 공민왕의 뒤를 이어 우왕(禑王)이 즉위하자 우왕은 다시 이색을 불러 도와줄 것을 청했다. 이에 응해 관직 생황을 하던 중 우왕 14년(1388) 새롭게 흥기한 명(明) 나라가 철령 이북의 땅을 환수하고자 철령위 설치를 통보해 왔다. 이에 대한 대책을 둘러싸고 강경파와 온건파가 대립하였는데 당시 판산사사(判三司事)의 벼슬에 있던 이색은 주화론(主和論)을 주장했다. 그러나 최영을 비롯한 강경파의 의견에 따라 요동정벌이 단행되었다. 정벌을 떠났던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함으로써 우왕이 폐위되고 후계자 문제가 논의되었다. 이성계는 왕씨 종실의 먼 일가인 요(瑤)를 세우려 했고 조민수는 우의 아들 창(昌)을 세우려 하였다. 이때 원로대신이었던 이색은 조민수의 편을 들어 창왕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것이 후일 이성계 파의 탄압을 받는 화근이 되었다.

그러나 창왕이 즉위한 지 2년도 채 안되어 이성계 일파는 우왕과 창왕이 왕씨가 아니고 신돈의 자식이라는 우창신씨설(禑昌辛氏說)을 내세워 창왕마저 폐위했다. 그리고는 원래 세우려 했던 요를 내세워 1389년 공양왕으로 옹립했다. 그러자 이성계 일파는 이색을 극렬하게 탄핵했다. 이때부터 그의 유배생활이 시작되었다. 경기도 장단, 충청도 청주, 경북 함창, 전남 장흥 등이 그의 유배지였다. 그러다 65세 때인 1392년 이성계가 조선의 태조로 왕위에 오르자 비로소 고향인 한산으로 돌아오게 됐다. 그 사이 장남인 종덕은 병으로 죽고 차남인 종학은 귀양갔다가 이방원이 보낸 밀사에게 살해당하였다. 삼남인 종선만은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조선에서도 관직 생활을 했다.

그 후 이색은 인생의 허무함을 달래며 경기도 여주와 강릉 오대산을 돌아다녔다. 1395년 이성계와 상면한 후 이듬해 경기도 여주로 피서를 가다 배 안에서 사망했다. 일설에는 정도전이 이성계 명의로 하사한 술을 마시고 죽었다 한다.

그는 고려의 멸망과 함께 한 많은 일생을 마감했으나 그의 학문과 정신은 후손들에게 귀감이 되었던 것 같다. 사육신의 하나인 이개나 모든 학문에 통달하였으며 백성들을 위해 봉사했던 토정 이지함도 그의 후손이었으니 말이다. 모시 옷을 입고 소곡주에 취하더라도 이색의 학문과 정신 세계를 한번쯤은 되새겨 봐야 하지 않을까.

<대전대학교 인문예술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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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은 이색 묘소

▲'백제 유민들이 망국의 한을 달래며 마셨다는 ‘한산 소곡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