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김갑동 교수의 대전충청 역사문화 다시보기]성왕의 사비천도와 관산성전투

럭키홍 2010. 9. 1. 14:44

 

[김갑동 교수의 대전충청 역사문화 다시보기]성왕의 사비 천도와 관산성 전투

‘영토 회복’ 과제 관산성 전투 패배로 좌절
▲무령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성왕은 고구려의 침략 속에서 신라와의 우호 관계를 돈독히 하고 양 나라와의 교류도 지속하였다. 사비로 천도한 성왕은 내부의 결속과 영토 회복을 꿈꾸었다. 사진은 부여시내에 있는 성왕의 동상.

무령왕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성왕(聖王 : 523∼554)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통치 전반기는 고구려의 침략과 기존 대외 관계의 지속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가 즉위하자마자 고구려군이 패수(浿水)에 이르렀으므로 좌장(左將) 지충(志忠)에게 명하여 이를 격퇴시켰다. 이러한 고구려의 침략 속에서 그는 신라와의 우호 관계를 돈독히 하였고 양 나라와의 교류도 지속하였다. 성왕 2년(524) 양 나라에서 성왕을 “지절도독·백제제군사·수동장군백제왕(持節都督·百濟諸軍事·綏東將軍百濟王)”에 책봉하자 몇 년 뒤에 양 나라에 사절을 보내 통교하였다. 이어 그는 이듬해에 신라와 사절을 교환하여 동맹을 확고히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치적 중 특기할 만한 것은 사비(泗沘)로 천도하였다는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천도와 동시에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라 하였다고 나와 있다. 지금 ‘부여’라는 지명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 사비 천도는 이미 동성왕 대부터 추진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동성왕은 동왕 12년과 23년 10월·11월 등 세 차례에 걸쳐 사비의 벌판에서 사냥을 하였다. 이는 단순한 사냥이라 볼 수 없고 사냥을 핑계 삼아 사비의 지형 지세를 살피고 민심을 엿본 것이었다. 또 23년 8월에는 가림성을 쌓고 백가로 하여금 지키도록 했다. 가림성은 현재의 부여군 임천면에 있는 성흥산성으로 비정되는데 이는 천도 후 북방 경비를 강화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나 한다. 그러나 동성왕은 천도에 실패하였다. 그러다가 성왕대에 와서 천도가 단행된 것이다.

이 사비 천도에도 웅진 천도처럼 이 지역의 지방세력에 의한 권유가 작용했을 것이라 짐작된다. 이 지역의 지방세력이란 다름 아닌 ‘사씨(沙氏)’ 세력이었다. 사씨 계열의 인물로는 이미 동성왕 6년 양 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된 바 있는 내법좌평 사약사(沙若思)가 있었다. 성왕 대에 정계에서 활약한 사씨 세력은 잘 찾을 수 없지만 이들의 영향력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들이 천도 후보지로 사비를 추천한 것은 사비가 넓은 들판을 갖고 있어 사방으로 뻗어나가기가 용이하였고 부소산성과 같은 방어시설을 쉽게 조성할 수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사비 천도 이후 성왕은 내부의 결속과 영토 회복을 꿈꾸었다. 즉 겸익과 같은 승려를 등용하여 불교의 진흥을 꾀했다. 국가의 정신적 토대를 강화하는 데 불력의 힘을 빌고자 했던 것이다. 그의 시호 ‘성왕’은 무력이 아닌 불법의 수레바퀴를 굴려 세계를 통치하는 ‘전륜성왕(轉輪聖王)’에서 따온 것이었다. 외교문제도 소홀히 하지 않아, 중국 양나라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한편 왜국에도 문물을 전달해주었다. 이로써 문제 발생 시 든든한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우방을 만들어놓았다.

이제 남은 것은 고구려에 빼앗긴 땅을 되찾는 일이었다. 그는 신라와의 동맹관계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한다. 그리고는 선제공격을 감행했다. 그 결과 동왕 18년(540) 고구려의 우산성을 쳤으나 패했고 동왕 26년(548)에는 고구려의 침략을 신라와의 공동작전으로 격파했다. 동왕 28년에는 고구려의 도살성을 공격해 함락하였으며, 다음 해에는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해 격파하기도 했다.

이즈음 신라에서는 한창 전성기를 맞고 있었다. 신라는 지증왕(智證王 : 499∼514)대에 뒤늦게 국가의 기틀을 마련했다. 지증왕은 우경(牛耕)을 장려하여 농업생산성을 증대시켰다. 국호도 새롭게 ‘신라(新羅)’로 정하였고, ‘마립간(麻立干)’이라 하던 칭호도 ‘왕(王)’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법흥왕(法興王 : 514∼540)대에는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가 더욱 갖추어졌다. 그는 율령을 반포하여 국가의 시책에 따르지 않는 자를 처벌하였다. 또 ‘건원(建元)’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도 사용하였는데, 중국과 대등하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법흥왕 14년(527) 불교를 공인하여 새로운 이념에 입각한 체제 정비를 꾀하였으며, 영토확장도 시도하여 법흥왕 19년(532) 김해의 금관가야를 병합했다.

뒤이어 법흥왕의 조카인 진흥왕(眞興王 : 540∼576)이 7세의 나이에 즉위한다. 처음은 어머니의 섭정을 받았으나, 19세 때인 진흥왕 12년(551) 친정을 시작하며 ‘개국(開國)’이란 연호를 사용했다. 진흥왕이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은 영토확장이었다. 진흥왕 11년(550), 백제와 고구려가 싸우는 틈을 타서 그는 이사부를 파견하여 백제가 함락시켰던 도살성(道薩城)과 금현성(金峴城)을 차지했다. 동왕 12년에는 고구려가 돌궐의 침입 때문에 북방에 신경을 돌렸을 때 거칠부 등 8장군을 보내 고구려의 10성(城)을 차지했다. 한편 백제와 신라는 공동작전을 통하여 한강 유역을 수복하였다. 그러나 신라의 진흥왕은 백제가 차지하기로 했던 한강 하류지역을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군단을 배치하였다.

이에 성왕은 자기의 딸을 신라에 시집보냈다. 땅을 빼앗긴 성왕이 딸을 시집보낸 것은 신라를 방심시켜놓고 보복할 시간적 여유를 얻고자 함이었다. 신라는 백제를 무시할 수 없어 왕녀를 제2비로 삼기는 하였지만, 앞으로 있을 백제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결국, 백제가 신라의 관산성(管山城 : 충북 옥천)을 공격함으로써 양국 간에 전투가 벌어졌다. 백제와 가야·왜의 연합군은 성왕의 아들 여창(餘昌)의 지휘로 관산성 근처의 구타모라(久陀牟羅)에 요새를 구축하고 있었는데, 왜군의 선봉대가 화공작전을 벌여 관산성을 함락하였다. 이에 놀란 신라는 북쪽의 신주(新州) 군주(軍主) 김무력(金武力 : 김유신의 할아버지)의 군대를 동원하고 전국에서 군대를 징발하여 관산성 탈환을 꾀하였다. 그러던 중 성왕이 직접 전쟁터에 온다는 말을 듣고 간첩을 이용하여 그 진로를 탐지하였다. 삼년산군(三年山郡 : 충북 보은)의 한 지휘관이었던 도도(都刀)의 지휘를 받은 복병은 성왕이 오는 길목을 차단하고 성왕을 습격하여 전사케 하였다. 이를 계기로 신라군은 군사를 휘몰아 관산성을 탈환하는 한편, 좌평 4인과 백제군사 2만 9천 6백 명을 전사시켜 크게 이겼다.

당시 백제는 수도의 천도로 인한 대규모 토목공사와 빈번한 전쟁으로 농민과 군사들이 피곤에 지쳐 있었다. 또 전투에 앞서 왕족과 귀족의 견해가 일치하지 못하였다. 기성 귀족들은 이 전투를 반대하였으나 젊은 태자 여창은 이를 무시하고 전투를 감행하였다. 무리한 전투 결과 백제는 그때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던 가야 지역을 잃었고, 신진 귀족세력들이 등장하여 왕권이 위축되었다. 또 비옥한 한강 유역을 빼앗김으로써 중흥의 기회를 상실하였다. 고구려를 격퇴하는데 잠시 신라의 힘을 빌었지만 오히려 동맹국 신라의 공격으로 곤경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대전대학교 인문예술대학 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