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박난 기업 뒤엔'환상의 궁합' 있다
잡스가 아이디어 내면… 쿡이 생산·판매 책임져… "애플, 잡스만 두명 있었다면… 그저그런 벤처로 끝났을 것…
"나이키·스타벅스 등도… 경영진의 조화로 성과 내…
'창의와 혁신' 원하는가?… 스타일 다른 인재들 붙여놔… 서로 보완하고 자극시켜라… "다름이 창조를 낳는다"…
전자부품 회사에 다니는 김 대리는 얼마 전 새로 옮겨 간 부서에서 당황스러운 경험을 했다. 평소 논리적이고 꼼꼼하기로 정평이 나 있던 김 대리는 심혈을 기울여 작성한 제품 홍보 계획을 부장님에게 보고하다가 면박을 당했다. 고객 설문 결과에 근거해서 새로운 계획들을 보고하던 중 부장님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이런 것 말고 통신회사들이 하는 포인트 제도를 도입하는 건 생각해 봤나?"라고 물었을 때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소비재도 아닌 전자 부품에 무슨 포인트 제도?' 김 대리는 의아한 가운데 찜찜하게 첫 번째 부장님 보고를 끝냈다.나중에 들어 보니 부장님은 항상 새로운 아이디어를 요구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실제로 실행이 되는 것이 많지 않더라도 회의 때마다 깜짝 놀랄 아이디어를 준비해 가지 않으면 낭패를 당한다는 것이다. 논리적이고 현실적인 김 대리는 앞으로 새로운 부장님과 호흡을 맞춰 갈 일이 벌써부터 큰 걱정이다.
얼핏 보기에 김 대리와 부장님은 소위 '궁합'이 잘 맞지 않아 보인다. 이것은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가치 체계와 일하는 방식의 차이로 단순한 '성격 차이'보다는 훨씬 더 근본적이다. 이런 차이를 과학적으로 분석한 것이 마이어스와 브릭스가 창안한 MBTI 성격 유형이다.
■스타일이 다른 김 대리와 부장님의 공생 게임
위의 예를 보면, 김 대리는 '인지(sensing)형', 부장님은 '직관(intuition)형'이다. 인지형의 사람들은 과거의 사례 등 손에 잡히는 정보가 있어야만 마음이 놓이고, 여기에 근거해서 실행 가능하고 치밀한 대안을 내놓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직관형 사람들은 추상적이고 상상력이 가미된, 전혀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 내는 데 능하다. 김 대리의 경우처럼 부하 직원이 인지형이고 상관이 직관형일 경우에 상관들은 "새로운 아이디어가 하나도 없다"고 하고, 김 대리 입장에서는 "실행 가능성이 없는 말씀뿐이다"라고 불평을 하게 되는데, 이러면서 조직의 갈등이 커지고 서로를 무능하다고 몰아붙이게 된다.
김 대리와 부장님의 차이가 정보를 수집하고 가공하는 방식에 있다고 한다면, 조직원들 간의 궁합을 좌우하는 또 다른 요소는 실행 방식의 차이다. 어떤 사람들은 어느 정도 방향성만 합의가 되면 일단 일을 벌이기 시작한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완벽한 계획이 세워지고, 혹시 있을지 모르는 돌발 사태에 대한 대비책까지 고민한 후에야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런 두 사람이 해외 출장이라도 같이 가게 된다면 한 사람은 "준비성 없는 사람 때문에 내가 고생"이라고 하고, 다른 한 사람은 "융통성 없는 사람 때문에 숨이 막힐 지경"이라며 서로에 대한 불만이 생기게 마련이다.
이처럼 정보의 수집, 분석, 이를 통한 의사 결정, 그리고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실행의 전 과정에서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타고나거나 후천적으로 학습한 여러 가지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그림을 그리라고 하면 눈앞에 보이는 정물을 그리는 사람과 상상 속의 우주 정거장을 그리는 사람이 있고, 심사숙고해서 한 장을 그리는 사람과 금방 스케치북 한 권을 채우는 사람이 있다. 이런 특성들은 생각보다 그 뿌리가 깊어서 노력한다고 해서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조직에서는 앞의 사례와 같은 크고 작은 갈등이 끊일 수 없는 것이다.
과거에는 이런 경우에 대해 두 가지 명확한 정답이 존재했다. 첫째, 부하 직원이 상관에게 맞추어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부하 직원은 재미있는 일화나 외국의 사례가 곁들여진 다채로운 보고서를 만들어 보고 싶어도 상사가 밋밋하고 논리 정연한 보고서를 원한다면 거기에 맞추지 않고 배기기는 어렵다. 둘째, 이러한 조직 내 갈등은 적을수록 좋기 때문에 가능하면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로 팀을 구성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재무실에는 회계학이나 경영학을 전공한 사람들만 배치해서 아예 동질적인 집단으로 만드는 것이다.
- ▲ 일러스트=박상훈 기자 ps@chosun.com
하지만 조직 성공의 무게 중심이 '운영의 효율성'에서 '창의와 혁신성'으로 옮겨 오면서 이런 정답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13~17세기 피렌체 지역을 다스렸던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이 그랬듯이 다양한 생각과 문화의 융합 속에서 혁신이 싹트고, 이러한 융합의 중심에 조직과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김 대리와 부장님처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은 오히려 많을수록 좋고, 이런 사람들이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보완하고 자극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이 기존의 정답을 대체하고 있다.
아이팟·아이폰·아이패드로 끊임없이 세계 시장에 화제를 몰고 오는 애플이 좋은 사례다. 이 회사의 스티브 잡스는 가장 창의적이고 대중성이 강한 CEO로 그 자신이 회사의 아이콘이자 마케팅 수단이다. 하지만, 항상 꼼꼼히 전 세계 생산 라인과 판매를 관리해 준 티모시 쿡(Timothy Cook)이 없었다면 오늘날 애플의 성공은 없었을 것이다.
스티브 잡스가 자유로움과 창의성의 상징이라면 티모시 쿡은 최고운영책임자(COO)다운 엄격함과 효율성의 상징이다. 매일 새벽 4시 30분에 규칙적으로 이메일을 발송하고, 매주 일요일 저녁에 다음 주 계획을 논의하는 전화 회의를 가졌던 것으로 유명하다.
만약 애플에 스티브 잡스와 티모시 쿡이 아니라, 스티브 잡스와 같은 천재만 두 명이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애플 역시 기발한 아이디어는 많지만, 안타깝게 자취를 감춘 수많은 벤처 기업 중의 하나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부장님과 같은 스티브 잡스와 김대리 같은 티모시 쿡이 서로를 보완해 주었기 때문에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나이키, 스타벅스, 캘빈 클라인도 마찬가지다. 빌 보워먼, 하워드 슐츠, 캘빈 클라인과 같은 창의적 인물들이 아이디어를 쏟아내고 필 나이트, 오린 스미스, 배리 슈워츠와 같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안주인들이 꼼꼼히 집안 살림을 챙겨준 덕분에 아이디어와 실행이 균형을 이룬 거대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테라다인은 성공하고 hp는 실패한 이유
이처럼 다양한 인재들의 역량을 조화롭게 활용하고 시너지를 창출하는 것이 중요해짐에 따라 많은 기업들은 어떻게 그런 조직 환경을 만들수 있느냐를 고민하고 있다.
우선적으로는 어느 한 사람이나 부서의 의견이 전체를 압도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많은 기업들이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R&D, 구매, 디자인 등 핵심적인 기능들을 중앙집중화하고 있는데, 이것이 과할 경우 편향된 시각에서 일방통행적인 의견을 강요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반도체 검사 장비 업체인 테라다인(Teradyne)과 컴퓨터 제조 업체 휴렛팩커드(hp)는 차세대 기술 개발을 위해 각각 '오로라'와 '키티호크'라는 사내 별도 조직을 구성했다. 두 업체 모두 이 별도 조직에 외부 인재의 자유로운 채용 등 자율성을 부여하고 적극적인 지원을 제공했다. 하지만 테라다인의 오로라는 큰 성공을 거둔 반면, hp의 키티호크는 실패로 끝이 나고 말았다. 테라다인은 기술 개발과 판매 부서간 협의를 통해 초기 판매 가격이나 매출 목표를 합리적으로 결정한 반면, hp는 판매, 재무 부서가 오직 수익성 관점에서 무리하게 기술 개발 부서를 밀어붙인 것이 그 원인이었다. R&D, 디자인 인력과 판매, 재무 부서 인력은 많은 경우 상반된 시각을 가지게 마련인데 이 둘 중 어느 한쪽이 회사를 주도하게 되면 다양성을 기반으로 한 혁신은 요원하게 된다.
'선 추진, 후 조정'의 원칙과 이를 위한 사내 위원회(committee) 활용도 필요하다. GM이 전기자동차 볼트(Volt)를 개발할 때 가장 큰 걸림돌은 거대한 이 회사의 관료제적 의사 결정이었다. 엔지니어들의 전기차에 대한 구상은 현실주의적인 고위 임원들 때문에 한 발짝도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루츠(Lutz) 부회장은 "엔지니어들은 본능(instinct)을 믿고 개발에 집중하라. 최종 결정은 전사 의견을 조율할 수 있는 위원회에서 한다"는 원칙을 내놓았고, 이후 개발은 급물살을 타고 이루어졌다. 의견을 조율해서 걸러진 아이디어의 범위 안에서 창의성을 강요하는 방식에서, 우선은 다양성을 극대화하고 최종 의사 결정에서 이를 조율하는 방식으로 전환을 이룬 셈이다.
■당신의 티모시 쿡은 누구?
- ▲ 나이키 공동창업자인 빌 보워먼(왼쪽)은 오리건대 육상코치였던 자신의 경험을 살려 1960~70년대 혁신적인 육상화를 개발했고, 필 나이트는 그것을 기반으로 나이키를 지금의 세계적인 브랜드로 키 웠다. /AP
끝으로 조직이 다양한 인재를 채용, 육성할 수 있는 인프라의 구축이 필요하다. 채용 단계에서도 틀에 박힌 조건들을 줄이고, 다양한 인력들이 공통으로 참여하는 교육 기회를 넓혀야 한다. 평가 지표도 정형적인 '업무 수행' 결과뿐 아니라 혁신에 대한 기여도나 팀워크 등을 포함해서 다양성과 상호 보완을 통한 시너지가 창출될 수 있는 토양을 조성해야 한다.
제품과 기능의 융합을 통한 새로운 시장의 창출이 혁신의 대세가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조직 내 역량도 더욱 다양화되어야 한다. 서로 다르다는 것이 비효율을 초래하는 것이 아니라 조화와 혁신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 구축이 필수적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리더가 될수록 내가 잘 아는 것만을 고집하고 나와 다른 생각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 자세에서 벗어나 나를 보완해 줄 수 있는 티모시 쿡(또는 스티브 잡스)을 찾겠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