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스님을 좋아하세요? 입적하신 스님을 만나뵐 수는 없지만, 남겨두신 책을 통해서 스님이 여전히 살아 계심을 느낍니다. 일상의 부대낌 속에서 살아갈 내 안의 힘을 잃어버릴 때마다 스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입니다. 스님처럼 단순하고 소박하게 인간으로서 가야할 길을, 모순과 갈등으로 이루어진 이 세계에서 해탈의 저 세계에 이르는 길을 만나게 됩니다. 스님은 단 한 번도 꾸짖거나 야단치지 않지만, 한 줄의 글귀마다 읽고 있는 저 스스로의 삶을 ‘스님의 거울’에 비춰보게 됩니다. 세속에 찌든 나를 새롭게 만들어줍니다. 나는 스님이 그립니다.
스님의 오두막 한쪽 벽에는 이런 글귀가 붙어있다고 합니다.
‘홀로 행하고 게으르지 말며, 비난과 칭찬에도 흔들리지 말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스님은 이 글귀가 눈에 들어올 때마다 두런두런 외우면서 자신의 내면이 한층 깊어짐을 느꼈다고 합니다. 아무렇게나 함부로 지낼 수 없는 이유는 등 뒤에서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듯한 눈총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 눈총은 바로 오직 자기 자신이었을 것입니다. 스스로 내면을 가꿀 줄 아는 모습에서 존경을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책은 수많은 불교 경전 중에서도 가장 초기에 이루어진 경전입니다. 부처님에게는 자기 자신이 어떤 종교의 창시자라는 의식이 전혀 없었습니다. 단지 눈 뜬 사람으로서 그 역할을 삶으로 보여주었을 뿐입니다. 그에 대한 호칭이 ‘수행자’ ‘널리 보시는 분’ ‘고타마’ 등으로 불리는 것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제자들은 스승의 가르침을 간추려 간결한 산문의 형태로 글을 남겼는데, 그것이 초대 불교의 시초가 된 것입니다. 종교가 아니면서도 하나의 종교로 자리매김 한 경전, 이 책은 바로 그러한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저에게 이 책이 기억에 오래도록 남는 이유는 법정 스님이 옮겼다는 점에 있습니다. 저는 불교 신자도 아니고, 불교 경전에 깊은 조회가 있지도 않습니다. 부처님을 따랐던 제자들처럼, 오늘날 법정 스님이 보여주신 삶의 모습을 따르고 싶은 한 사람일 뿐입니다. 종교의 존재 유무를 떠나, 그 이전에 앞서 걸었던 시대의 어른이 보여준 삶의 모습을 존경할 따름입니다. 해마다 스님의 글이 묶여진 책을 기다렸고, 계절마다 법당에서 들려주신 법문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스님은 항상 세속과 떨어진 어느 오두막에서 지내셨고, 그런 스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오직 책과 말씀 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연유가 <숫타니파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보여주는 삶의 모습은 그가 가진 지식과 살아오면서 사회 속에서 겪은 경험의 조합일 수밖에 없습니다. 세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삶의 모습이 스님과 다른 이유는 물질로 대표되는 사회 속 경험들이 그가 가진 지식보다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스님의 이야기를 읽어도 우리가 무소유하기 힘든 이유가 되겠지요. 그렇게 삶의 부족함이 느껴질 때마다 많은 이들은 스님을 그리워합니다. 다시금 삶을 돌아보게 되는 이유는 우리들 눈에 보이는 삶의 경험들보다 소중한 새로운 인식이 자리잡기 때문입니다. 스님의 삶을 바라보면서... 스님은 어떻게 그러한 높은 경지의 인식을 가지게 되었는지 궁금했습니다. 아마도 자신의 오두막 한족 벽에 남겨둔 글귀, 그러니까 이 책에서 가져온 것들에 기인하지는 않았을까요! 법정 스님이 그리운 분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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