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몽고의 침입

럭키홍 2011. 9. 25. 08:20

 

몽고의 침입

몽고의 1차 침입(1231년)
몽고 사신이 압록강 근처에서 피살된 것을 굿실로 살리타가 개경까지 침입하였다. 전쟁 준비를 하지 못한 고려는 몽고와 곧 강화하였다.

몽고의 2차 침입(1232년)
몽고가 무리한 공물을 요구하자 최우는 강화로 도읍을 옮기고 몽고에 항전하였다. 이에 몽고가 침입하였으나 김윤후가 적장 살리타를 사살하자 몽고군은 퇴각하였다.


몽고의 계속되는 침입
2차 침입 후 몽고군은 4번이나 더 침입했다. 고려는 온 겨레가 하나로 단결하여 몽고군의 침략에 맞섰다. 몽고가 바다싸움에 약한 것을 이용하여 도읍을 강화로 옮긴 뒤 약 40여 년간 꿋꿋하게 대항하였다.

몽고 침입의 결과
국토가 황폐해졌다.
귀중한 문화재가 많이 없어졌다.
몽고의 간섭을 받게 되었다.


삼별초의 항쟁

삼별초의 조직과 주장
삼별초는 도적을 막기 위해 만든 특별부대와 몽고군에 잡혀 갔다 탈출한 병사들을 합쳐 만든 부대이다. 몽고와 화해하고 개경으로 환도하는 것은 몽고에 대한 굴욕적인 항복이라고 주장하면서 끝까지 싸울 것을 다짐하였다.

삼별초의 항전
배중손이 이끄는 삼별초는 근거지를 강화도→진도→제주도로 옮겨 가며 끝까지 항전하였다. 일반 백성들의 도움도 있었다. 김통정의 지휘 아래 제주도에서 몽고군에 맞서 싸웠지만 힘이 모자라 4년만에 무너지고 말았다.

삼별초 항쟁의 의의
외적에게 쉽게 굽히지 않는 우리 민족 정신의 본보기가 되었다. 고려인의 자주 정신과 꿋꿋한 기상을 엿볼 수 있었다.

 

 

 

 

몽고 : 13세기

 

원인 - 최씨 무신정권이 안정되어 갈무렵 대륙에서 몽고족이  통일세력을 형성하여

            을 정벌하여 북중국을 손에 넣었다. 이때 의 지배하에 있던 거란족이

            멸망을 틈타 일시 독립하였다가 몽고군에 쫓겨 고려의 영토내로 들어왔다.

            이때 고려몽고는 연합하여 거란을 토벌한후 몽고고려에 대해

           과중한 공물을 요구하는데 1218년 조공 약속(강동의 역)을 하게된다. 

           이후 공물을 받아가던 몽고사신이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구실로

           고려에 침입하게된다.

 

경과  - 1차침입(1231)은 강화가 성립되어 곧 몽고군은 철수하였지만 몽고의 계속되는

             무리한 요구로 인해 고려는 다시 항쟁을 결의하고 도읍을 강화도로 옮겨

              장기전에 대비하였다. 고려의 이러한 강경태도는 몽고를 자극하여

              재침이 시작되고 30여년간 6차에 걸친 칩략을 받게된다.

 

결과 - 몽고의 침입으로 인구는 줄고 국토는 극도로 황폐화 되었으며

             황룡사 9층탑이나 부인사에 소장되었던 초조대장경의 소실등

             막대한 문화재 손실을 입게되었다.

             대몽항쟁을 강력히 추진하던 최씨정권이 강화를 원하던 국왕과 문신들에 의해서

             몰락함으로써 몽고와 강화를 맺고 원종11년 고려는 개경으로 환도한다.

             고려의 개경환도는 몽고에 대한 굴복을 의미하였으므로 최씨정권의

             군사적 배경이 되었던 삼별초는 강화도에서 진도 제주도로 옮기면서

             저항을 계속 하였으나 결국 고려몽고의 연합군에게 진압되고 말았다.

 

< 각각 다르게 요약.>

 

1. 12세기 말-13세기 초의 국제정세

12세기 후반 농민, 천민의 항쟁이 전국적으로 발생.
북중국과 만주지역에서는 금, 남중국에서는 송, 몽고 남서쪽에서는 西夏, 한반도에서는 고려가 자리잡음. 몽고족이 흥기하면서 변화가 일어남.
1206년 테무진이 몽고 통일. 서하(1227), 금(1234), 고려, 남송에 대해 공격. 종래의 세력균형 상태가 깨지고 몽고족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국제질서 수립.
1219년 몽고와 고려가 연합해서 거란족 토벌. 몽고와 고려의 첫 접촉.
형제의 맹약을 맺음. 무리와 공물 요구와 사신의 행패.

2. 몽고의 침입

1225년 몽고사신 저고여가 몽고로 돌아가다 압록강에서 피살됨.
1231년부터 1259년까지 약 30년 동안 6차례 침입.
군사전력적인 이유가 큼. 고려와 남송이 연합해서 대항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함.
1차 침입: 서북면 40개성에 다루가치 72명 설치.
1232년 최우정권은 수도를 강화도로 옮김. 山城,海島入保.
천도이유: 장기전에 대비한 청야전술, 정권 유지.
몽고와의 전쟁으로 지방통제력이 약화되자 농민항쟁 재연. 몽고와의 항쟁, 무신정권에 대한 항쟁.
2차 침입: 살리타이가 처인성에서 사살됨.
3차 침입: 전국 유린. 부인사의 대장경, 황룡사 9층탑 소실.

3. 강화

1254년 몽고군의 대공세. 연안섬에 대한 공격 시작.
강화조건 완화: 태자 입조.
漢地派와 漠北派의 대립에서 한지파가 승리.
일반민의 몽고 투항.
1258년 최의가 김준에게 피살됨. 최씨정권 붕괴. 세자 입조.
원종과 세조의 만남.(行省을 통한 직접지배, 왕족에게 분봉하는 간접지배, 다루가치 파견) 고려의 경우 포함안됨. 독특한 방식-간섭.
1270년 임유무 피살. 몽고와 강화. 출륙환도.
강화과정은 고려의 지배층(국왕, 문신관료 등)이 몽고와 결탁하는 과정.

4. 삼별초의 항쟁

원의 군사력에 의해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환도가 이루어지자 무신정권의 무력 기반이던 삼별초가 반발하여 봉기함.
각지에서 삼별초에 호응하여 민이 봉기.
진도 용장성.
제주도 항파두성.
1273년 여몽연합군에 의해 진압당함.
고려내의 항몽세력 제거. 지배층에 대한 민의 항쟁 진압.

5. 호남과 무신정권

최씨정권의 출현과 함께 전라도세력의 중앙정치무대로의 진출이 두두러짐.
무신집권기 이전에도 중앙정계에 영광김씨, 장흥임씨, 남평문씨 등 전라도세력들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었으나 무신집권기가 되면서 친무신계열의 전라도세력이 등장하여 경제적, 사상적인 배경으로써 일익을 담당.
최씨정권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던 서남해안 및 도서지역의 유력 토호세력이 등장하여 삼별초 항쟁을 지원.
송광사의 정혜결사와 같은 친무신정권적인 성향을 가진 집단도 생성.
중앙정계에 진출한 탐진최씨, 장흥임씨, 장흥마씨 등 강진의 대표적 토호집단은 청자의 발달과 연관. 승주의 송광사 불교세력과 함께 쌍벽을 이루게 되는 무위사와 월남사를 중심으로 한 불교세력도 최씨정권과 밀접한 관계. 청자의 발달과 연관.

 

re: 몽고의 침입

몽고의 1차 침입(1231년)
몽고 사신이 압록강 근처에서 피살된 것을 굿실로 살리타가 개경까지 침입하였다. 전쟁 준비를 하지 못한 고려는 몽고와 곧 강화하였다.

몽고의 2차 침입(1232년)
몽고가 무리한 공물을 요구하자 최우는 강화로 도읍을 옮기고 몽고에 항전하였다. 이에 몽고가 침입하였으나 김윤후가 적장 살리타를 사살하자 몽고군은 퇴각하였다.


몽고의 계속되는 침입
2차 침입 후 몽고군은 4번이나 더 침입했다. 고려는 온 겨레가 하나로 단결하여 몽고군의 침략에 맞섰다. 몽고가 바다싸움에 약한 것을 이용하여 도읍을 강화로 옮긴 뒤 약 40여 년간 꿋꿋하게 대항하였다.

몽고 침입의 결과
국토가 황폐해졌다.
귀중한 문화재가 많이 없어졌다.
몽고의 간섭을 받게 되었다.

< re: 몽고의 침입 > 
  몽고는 중국 북방에서 오랑캐로 불리던 유목 민족입니다.

테무친이란 사람이 주변의 부족들을 다 통합하고 세력을 키워 중국을 덮칩니다.

이 때 중국의 주인이였던 금나라와 송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합니다.

이후 원나라를 세운 이들이 서양과 고려로 진출하는 것입니다.

 

  원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공물을 보내달라'고 하는데, 그 공물이 너무 많아서 감당이 불가능한 수준이 됩니다. 어찌어찌 타결이 되서 고려 사신이 돌아가는 데, 고려인으로 위장한 여진족(맞나?)들이 사신이 가는 길에 매복해 있다가 피살해 버립니다. 고려인이 사신을 죽인 걸로 안 원나라의 왕은 분노해 몽고군을 보냅니다. 계속 진격하던 몽고군은 처인성(용인시에 있었다고 합니다)이라는 곳에서 전투 중에 김윤후란 스님이 쏜 화살에 장군인 살리타가 맞아 죽자 지휘력이 없어져 다시 돌아가고 맙니다.

 

  시간이 지난 후 원나라는 대군을 일으켜 고려를 향해 쳐들어 오는데, 이 때 고려 정부를 이끌던 최우란 사람은 지도층만 이끌고 강화도로 천도를 해버립니다. 백성들은 원나라 군대에 쑥밭이 되고…… =_=. 백성들은 열심히 원나라에 대항했지만 역부족이었죠. 강화도에 피신 간 정부 내에서도 반론이 일어나 최우를 숙청하고 몽고와 강화 조약을 맺습니다. 서로 친해지기로 조약을 맺은 후 개경에 환도하고, 여기에 반발한 배중손 및 '삼별초'라 불리는 군인들이 강화도에서 진도, 진도에서 제주도로 옮겨 가며 모두 죽을 때까지 항쟁을 합니다. 삼별초의 항쟁도 모두 진압되자 원은 고려 정치에 이래라 저래라 간섭을 하고, 원의 세력에 빌붙어 잘사는 '권문 세족'이란 놈도 나타나게 됩니다(친일파랑 비슷한 속성을 가지고 있음). 아래 용어는 원의 내정 간섭기에 나온 용어들입니다(역사가들이 붙인 이름도 있어요)

 

* 권문 세족 - 원의 세력에 빌붙어 출세한 놈들을 일컫는 말. 이 때 몽고의 힘을 믿고 엄청나게 권세를 부리다가 공민왕 대에 와서 숙청당합니다. 자신의 누이동생을 바쳐 일동공신이 된 기철이 대표적 인물이에요.

* 고려양 - 몽고에서 유행한 고려의 풍속.

* 공녀 - 몽고 애들 결혼시키려고 고려에서 뽑은 처녀. 이 때 공녀로 뽑히는 걸 피하려고 많은 처녀들이 아주 어리거나 병 걸린 청년에게도 막 시집가고 그랬다.

* 몽고풍 - 고려에서 유행한 몽고의 풍속. 이 때 사람들이 몽고 스타일을 따라 하느라 머리도 땋고 그랬음….

* 응방 - 매를 잡아 사냥용으로 키우는 관청. 매를 잘 잡아 출세한 사람도 있었어요.

* 충○왕 - 원에게 충성을 맹세하라는 뜻에서 왕의 이름에 충자를 붙이게 했습니다.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 일본 원정 - 원나라는 고려에 일본을 정복하기 위해 필요한 군비를 대달라 요구합니다. 고려에서 백성들 먹을 것 입을 것 다 착취해서 겨우 마련한 함대는 원정 중 태풍을 만나 가라앉고, 원정이 2번이나 실패하자 원에서 원정을 포기하게 됩니다.

* 팔만대장경 - 최우는 강화도에서 불심의 힘을 빌려 몽고를 물리치고자 불교의 경전을 정리하는 일을 시작합니다. 글자 하나 하나에 혼을 담아 만든 팔만대장경은 강화도 합천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으며, 현재는 썩는 걸 막기 위해 첨단 관리 시스템을 도입한 상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