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겸손 (謙 遜)- | |
이상규 천주교 대전교구 신부 | |
요즘 한창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 FTA라는 도깨비 방망이가 어떻게 작동할지는 몰라도, 이러한 '자전거현상'은 목하 글로벌한 단계에 접어들 것이 분명하다. 자기광고와 피알(Public Relation)이 개인적 처세의 덕목을 뛰어넘어 사회전반에 중요한 수단이 되어버린 이때에 겸양이니 겸손이니 하는 따위의 단어는 물론 그런 생각까지도 시대착오적이다. 그러나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진 우리 삶은 그 동안 뒷전에 팽개친 겸손의 덕을 통해 치유될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서양언어에서 겸손은 라틴말 후밀리타스(humilitas)에서 유래하는데, 그 본디의 뜻은 '후무스'(humus) 즉 '땅 혹은 흙'이라는 어근을 가진다. 땅이라는 것이 하늘 아래 제일 낮은 곳이요 누구에게나 밟히는 대상이다. 이 땅은 그 누구의 발걸음도, 그 누구로부터의 밟힘도 거부하지 않는다. 땅은 모든 것을 받아주고 품어준다. 이 때문에 어찌 보면 가장 하찮아 보이지만 사실 그 안에 가장 고귀한 가치인 생명을 간직하고 있다. 모든 오물과 더러움을, 남들이 뱉어내는 모든 것을 보듬어 안고 있는 땅은 이상한 능력을 지닌다. 더럽고 지저분한 것들을 많이 받아들인 땅일수록 생명을 촉진하는 기름진 땅이 되니 말이다. 그리스도교 경전인 '성경'은 인간의 근원적 질료를 흙이라고 한다. 조물주께서 흙으로 인간을 지어냈다고 창세기는 이야기한다. 인간의 뿌리가 흙인 만큼 겸손은 어쩌면 인간이 가장 인간다워지는 길일 것이다. 따라서 겸손은 자신을 억지로 낮추는 자기비하나 자기의 가치를 절하시키는 굽신거림이 아닌 자신의 본 모습을 찾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 354-430)는 겸손에 대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 누구도 제 자신보다 더 작아지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단지 제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달으면 됩니다." 진정한 겸손은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아는 것(Cognosce te ipsum)"이라는 말에 많은 묵상거리가 있는 듯하다. 절대자 앞에선 자신의 모습까지는 아닐지라도 자신의 양심의 거울에 비친 모습을 제대로 쳐다보는 것으로부터 겸손은 시작될 것이다. 따라서 이 시대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본모습을 바라보는 자아성찰이 필요할 것이며, 이는 다른 말로 겸손을 배우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겸손을 베네딕투스(St. Benedictus 480-547)는 "하늘로 이끄는 사다리(Scala ad caelum)"라 불렀다. 이 사다리는 자기 자신은 물론 남들을 위한 사다리가 된다. 겸손한 사람만이 타인의 잘못과 실수를 마치 잡동사니를 받아들여 새로운 양분을 만드는 땅과 같이 된다는 뜻이리라.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에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이 있다. 무릇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뜻으로 자연과 인생의 순리를 말해 준다. 늘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물은 모든 더러움을 씻어내고 정화하면서 만물에 생명을 준다. 물은 앞서 가기를 다투지 않는데(流水不爭先), 다만 사람이 앞서기를 다투다 보니 상호간의 경쟁 속에서 시기와 질투, 중상과 모략이 생기고 유수와 같은 자연의 법칙을 어기게 된다. 물은 또한 자신의 모습을 고집하지 않는 기질이 있다. 자기를 담는 그릇의 모양에 따라 그것이 네모이든 세모이든 거기에 단지 자신을 채울 뿐이다. 물의 덕을 배워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 2000년 전 소위 그리스도교의 창시자로 불리는 예수라는 분의 말씀이다. 도덕교사도 윤리 선생도 아닌 예수가-내가 알기로-딱 한 번 배우라고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겸손이다. 겸손은 비단 그리스도교뿐만 아니라 인생의 근본 진리를 가르치는 모든 종교의 핵심이 되는 덕목일 것이다. 땅과 같이 포근하고 흙과 같이 풋풋하며 물과 같이 온유한 사람이 그립다. 시절이 각박하기에 더욱 그러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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