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대전 재발견- 대전천과 목척교

럭키홍 2012. 8. 2. 10:51

대전 재발견 - (5) 대전천과 목척교
멱 감고 스케이트 타고… 빛 바랜 추억 한 컷
▲1960년대 대전천에서 빨래하는 아낙네들(사진 위). 지금은 철거된 1992년 여름 홍명공원 모습.

대전천(大田川). 충남 금산군과 경계를 이루는 대전 동구 하소동 만인산에서 발원해 대전 시내 원도심을 가로질러 북쪽으로 흐르는 대전천은 유등천(柳等川)과 만나 갑천(甲川)으로 들어간 뒤 금강으로 흘러간다. 대전이 근대 도시로 형성된 다음 많은 이들이 대전에 모여 살면서 원도심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대전천을 흔히 ‘대전의, 대전 시민의 젖줄’이라고 불러왔다. 대전이 도시로서의 역사가 104년이 된 지금, 우리는 과연 대전천을 젖줄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하고 있는 것일까. 100여년 대전천의 변천사를 돌이켜보면 이에 자신 있는 대답은 못할 듯하다.

하천으로서의 길이 22.4㎞, 유역면적 138.45㎢인 대전천은 대전역 주변에 몰려 살던 일본인들이 늘어나면서 변형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대전이 대전면(大田面)이던 1926년 대전천과 그 지류에 치수공사와 하수공사를 위한 실시설계가 시작된다. 공사가 시작된 것은 1927년 3월. 1980년대와 1990년대에도 많은 비로 인해 일시적으로 대동천 등이 넘쳐 피해를 입은 적이 있었지만 이때도 여러 차례 비슷한 수해를 입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대전시 100년사 등에 따르면 대전면사무소는 대동천과 판암천 범람을 막기 위해 천류 변경공사를 단행했고 이와 동시에 하수도 공사도 실시했다. 인동·원동 등을 중심으로 한 일본인 시가지를 관통해 지하배수구를 구축하고 오수를 대전천으로 흐르도록 했다. 이 공사 결과 일본인 시가지에서는 악취가 상당부분 사라졌다는 것이다. 악취는 사라졌는지 몰라도 많은 양의 깨끗한 물이 흐르던 대전천에는 오수가 유입되기 시작했다.

이보다 앞서 1912년 돌로 된 징검다리만 놓여 있던 대전천에는 처음으로 다리가 세워졌다. 일본인들이 세운 목조다리로, 지금의 목척교가 있는 곳에 건설됐다. 그해 1월 공사를 시작해 완공되기까지 3개월이 걸린 이 다리를 일본인들은 ‘대전교’라고 불렀다. 해방 후 일본인들이 물러가자 한국인들은 이 다리를 철근콘크리트로 다시 만들어 확장했고 이 다리가 있던 동네 지명이 목척리(木尺里)였던 점을 고려해 목척교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후 순전히 일본인들의 필요에 의해 영교, 은행교, 중교 등 다른 다리들이 잇달아 세워져 사람들과 우마차, 차량들이 오갔다.

대전 중앙시장이 팽창하면서 경부선 철도와 평행선으로 흐르는 대전천은 자연스럽게 중앙시장의 경계선이 됐다. 각종 건물과 시설들이 대전천 주변에, 대전천과 나란히 들어섰다. 신도극장, 동화극장을 비롯해 각종 병·의원, 보문중·고교, 원동초등학교 등 학교시설과 여관, 중·소형 호텔 등 숙박업소도 자리를 잡았다. 대전천과 중앙시장 주변은 이렇듯 도심지로서의 면모를 갖춰 나갔다. 대전천에서는 또 주기적으로 하천 정비공사도 진행되기도 했다.

중앙시장 주변 대전천 제방은 인근 점포의 진열대 또는 상품을 쌓아놓는 적치대 역할도 했다. 식용으로 도살될 개나 닭이 개장, 닭장 안에 갇혀 쌓여 있던 시절도 있었다. 별다른 놀이시설이 없던 시절, 인근에 사는 어린이들의 놀이터이기도 했다.

아직은 대전천 물이 맑던 1950년대 여름철 사위가 어두워진 이른 밤이면 대전천은 인근 주민들의 목욕탕으로 바뀌기도 했다. 남자들이 상류에 자리 잡으면 여자들은 하류 쪽에, 또는 위치를 바꿔가며 목욕하러 대전천으로 들어가 몸을 씻던 때도 있었다. 몸만 씻기에는 재미없었던 듯 남녀 간에 수작이 오가는 소리도 주고받으며 땀에 절은 몸을 씻었다. 조모(70·대전 유성구 장대동) 할머니는 “결혼하기 전 50년대에는 여름밤이면 결혼한 언니를 따라 몸을 씻으러 대전천으로 나갔다. 남자들과 멀찍이 떨어져 옷을 잘 모아둔 다음 여자들만 모여 목욕을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1960대 들어서는 겨울철이면 대전천이 스케이트장으로 변신하기도 했다. 논이나 염전처럼 얕은 둑을 만들어 물을 가두어놓은 다음 얼음이 두껍게 얼면 집에 둔 스케이트를 갖고 나오거나, 현지에서 돈을 주고 스케이트를 빌려 신나게 스케이트를 지치는 학생, 어른들로 북적이곤 했다. 오진수 사진작가(70·대전 서구 도마동)는 “처음에는 스케이트장을 만들려고 물을 가두어놓은 게 아니라 소방시설이 부족했던 당시 순전히 만일에 대비한 소방용수로 쓰기 위해 물을 저장해놓은 것이었다”면서 “물이 얼게 되니 스케이트장이 됐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스케이트, 썰매를 지치는 모습은 장관이었다”고 전했다.

국토개발의 효과가 가시화되기 시작하던 1970년대 들어 대전천은 크게 변하기 시작한다. 목척교 주변을 콘크리트로 덮는 복개공사가 이뤄졌으며 콘크리트 덮개 밑에 수없이 많은 굵은 콘크리트 기둥이 세워졌다. 목척교는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그 형체를 잃어 버렸고, 그 양 옆에는 1974년 중앙데파트와 홍명상가라는 대형 상가가 세워져 문을 열었다. 대전에 고급 백화점이라고 할 만한 백화점이 없던 시절 두 대형 상가는 백화점에 버금가는 상가로 인식됐다. 중앙데파트는 이후 증축이 이뤄져 중앙관광호텔이 상가 위층에 자리 잡고 영업을 시작했으며 맨 꼭대기 층에 있던 디스코 클럽은 70년대와 80년대 밤이면 대전지역 대학생, 청년들이 몰려들어 춤을 추며 낭만을 구가하던 곳이었다.

대전천의 변화는 1990년대 더욱 가속화됐다. 대전에 지하철 건설계획이 발표되고 1996년 공사가 시작됐다. 지하철이 지날 중심가 주요도로가 공사장으로 변하면서 차량통행이 어려워지자 대전시는 대전천 둔치에 하상도로를 건설했다. 대전천 좌우 둔치를 따라, 곳에 따라서는 한쪽 둔치에만 콘크리트 도로가 개통됐다. 둔산 신도시와 원도심 간의 원활한 교통 소통을 위해서였다. 교통 흐름을 끊는 신호등이 거의 없어 운전자들에게는 ‘그나마 꿩 대신 닭’으로 여겨졌지만 환경을 중요시하고 예전의 추억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마땅찮은 존재가 됐다. 대전천 하상도로가 차량 소통에는 기여했는지 몰라도 시민들의 대전천 접근을 차단하는 부작용을 가져왔다. 서울 시민들이 올림픽대로와 강변북로 때문에 그저 한강을 쳐다보기만 하듯이 대전 시민들도 하상도로 때문에 대전천을 그저 바라보는데 그쳐야 했다. 갈수록 악화되는 하천오염과 건천화(乾川化) 현상이 겹치면서 지나쳐가기만 할 뿐 대전천을 찾는 시민들은 거의 없어졌다.

‘가로등 희미한 목척교에 기대서서, 나 홀로 이슬비를 맞으면서…’(안다성의 가요 ‘못 잊을 대전의 밤’ 중에서)라는 대중가요가 나올 정도로 대전 시민들과 함께 숨쉬고 흐르고 애환을 같이 했던 대전천과 목척교. 서울 청계천 복원에 자극받은 대전시가 ‘대전천의 생태하천화’를 모토로 “대전천을 시민에게 되돌려주겠다”며 대전천의 회복을 선언했다. 지난해 말 34년만에 동방마트(옛 중앙데파트)는 폭파공법에 의해 순식간에 해체됐고, 300명이 넘는 홍명상가도 해체를 목표로 협상이 진행 중이다. 두 상가 앞에 있던 공원은 아예 철거돼 바로 밑에 있던 대전천 둔치를 내려다볼 수 있게 됐다.

오래전 술자리에서 거나해진 누군가가 “대전천은 대전의 센 강”이라고 호기 있게 외치는 소리를 여러 차례 듣기는 했지만 이 같은 호언에 선뜻 동의하기는 힘들었던 대전천. 프랑스 파리의 센 강만큼 고급스런 문화콘텐츠가 풍부하게 배어 있지는 않다는 생각이었지만 대전에서 나고 자라고 생업을 이어온 시민들의 삶의 한 가운데에 대전천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대전시의 장담대로 대전천이 맑고 깨끗한 물이 흐르고 풀과 벌레들이 함께 살아가는 생태하천으로 탈바꿈할지 기대를 갖고 지켜볼 일이다. 대전천을 더욱 아름답게, 유명하게 하는 이야기·노래·그림·영화·문학 작품 등을 만들어내는 것은 시민과 예술가들의 몫이다. <글 류용규·사진 빈운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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