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대전 재발견 (1)프롤로그-강산이 여섯번 변해도 아름다운 한밭벌

럭키홍 2012. 8. 2. 11:08


 
  2009-02-04 12면기사
대전 재발견 (1)프롤로그-강산이 여섯번 변해도 아름다운 한밭벌
1905년 대전역 개통 이후 틀 갖춰…1993년 대전엑스포 계기 급속 발전
▲1970년대 대전역 광장에서 도청방향으로 바라본 모습.

올해는 대전(大田)이 시로 개시(開市)된 지 60년, 직할시 즉 요즘의 광역시로 승격된 지 20년 되는 해이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모든 게 너무 빠르게 급변하는 요즘 20년의 시간, 그리고 60년의 세월은 그 숫자가 가리키는 것 이상으로 많은 게 바뀌었음을 짐작케 한다. 실제로 몇 십년 전 대전시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을 사진으로 일별해보면 비슷한 풍경, 눈에 익은 모습을 찾기 쉽지 않다. 그만큼 대전시는 빠른 속도로 발전, 팽창해 온 것이다.

60년이면 환갑이다. 대전이 시로 출발한지 환갑을 맞은 셈이다. 평균수명이 길지 않던 시절 우리 민족에게 환갑은 인생의 마지막 통과의례였다. 다시 말해 60년을 살고도 더 오래 산다면 새로운 인생을 덤으로 받은 것으로 인식됐다. 시로 출발한 것만 따져 60년이 지났다면 대전의 지난 60년은 어땠는지, 또 그 전은 어땠는지 되돌아보고 새로운 60년을 준비해야 할 시점인 것이다.



현재 상주인구 약 150만, 지도(地圖)에서 마치 인체의 어금니 단면도처럼 보이는 행정구역상 면적이 539.84㎢에 달하는 대전이 현재의 도시로서의 틀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1905년 경부선 철도 대전역이 개통하면서부터로 볼 수 있다. 그 이전은 흔히 불리우던 순 우리말 지명인 ‘한밭’이라는 이름에서 보듯 논과 밭이 많았고 인구는 적은 한적한 분지형 농촌의 전형적인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이에 따라 근대적·전근대적 구분없이 도시로서의 대전의 역사는 103년이라고 말할 수 있다. 600년이 조금 넘는 역사를 내세우는 서울이나 2000년에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공주 부여 경주 등지에 비교하면 도시로서의 역사는 매우 일천한 셈이다.

하지만 한 지역으로서 대전의 역사는 짧지 않다. 현재의 서구 둔산동 일대에서는 구석기·신석기 시대에 사람이 살았던 유적이 발견됐으며 서구 괴정동 등지에서는 청동기 시대 유물이 발굴되기도 했다. 백제시대에는 우술군(雨述郡)과 황등야군(黃等也郡)이라는 행정단위에 속해 있었고 신라와는 접경지역이었다. 말하자면 백제의 최전방이었던 셈이다.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 후 757년 현재의 대전지역은 비풍군(比豊郡)과 황산군(黃山郡)에 속했으며 고려시대인 1413년 공주목 산하 회덕현(懷德縣)과 진잠현(鎭岑縣)의 부속지역이 되었다. 이 같은 행정구역은 큰 변화없이 수백년간 계속되다 조선시대 말기인 1895년 회덕현·진잠현이 회덕군(懷德郡)과 진잠군(鎭岑郡)으로 바뀌었다. 현재의 대전시 지역을 회덕군과 진잠군이 양분하게 된 셈이다.

현재의 위치에 대전역사가 들어서면서 주변지역인 정동 중동 삼성동 인동 은행동 등지에 일본인들이 모여들어 거류하기 시작했고 원래부터 살던 주민과 타 지역에서 이주해온 한국인들은 그 외곽 지역에 자리를 정하고 살았다. 기록을 들춰보면 1931년 대전면이던 행정구역이 대전읍으로 승격할 당시 인구는 2만3284명. 현재의 인구와 비교해보면 70여년간 무려 65배나 늘어난 것이다.

이듬해인 1932년 충남도청이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해 자리잡았으며 해방 후인 1949년 7월 지방자치법이 공포되면서 대전의 행정구역 명칭은 대전부(大田府)에서 대전시로 바뀌게 됐다. 32개의 일본식 기초단위 행정구역이었던 ‘정’(町)은 ‘동’(洞)으로 변경됐으며 행정수장도 ‘부윤’(府尹)에서 시장으로 바뀌었다.

다른 도시, 전국이 그랬듯이 대전에 급격한 변화가 오기 시작한 것은 6·25 한국전쟁부터다. 전황이 급박해지면서 정부는 1950년 6월27일 대전으로 천도를 결정했고 선화동 충남도청사가 임시 정부청사로, 대흥동에 있던 도지사 공관이 대통령의 임시 거처로 사용됐다. 대전에 임시로 머물던 정부는 19일 뒤인 대구로 옮겨갔다. 대전 이북지역에서 수많은 피난민도 몰려들어 문전성시를 이뤘다. 대전에 전시연합대학이 생겼고 이는 2년 뒤인 1952년 도립 충남대학교를 낳는 모태가 됐다.

이후 1960년대와 1970년대 고도성장기를 거치면서 경부고속도로 대전구간이 개통(1969년 12월)됐는가 하면 대덕연구단지가 오늘날 유성구 가정동 도룡동 신성동 등지에 자리 잡고 우리나라 과학기술 발전을 선도했다. 시 외곽지역에는 크고작은 기업체들이 둥지를 틀고 지역경제 발전을 이끌어 왔다.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기 40만명 선에 머물던 상주인구는 80년대 고도성장기에 급격히 늘기 시작, 100만명 선에 근접하게 된다.

한편으로 민주화 시기였던 1980년대, 대전 역시 이를 통과하는 고통을 겪기도 했다. 1990년부터는 둔산 신도시가 본격 개발되기 시작하고 1993년 ‘대전엑스포93’이 3개월여 열리면서 대전은 급격하게 발전하는 시기를 맞는다. 1989년 상주인구 100만명에 이르게 되면서 상당수 시민들의 염원이던 직할시로의 승격이 이뤄졌다. 충남 대전시이던 대전이 충남도로부터 분리돼 광역자치단체로서 독립하게 된 것이다.

이를 전후한 과정에서 몇 차례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대전시는 충남 대덕군 지역을 모두 흡수, 행정구역 상으로도 명실공히 대도시의 자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둔산 신도시는 1998년 정부대전청사가 입주하면서 약 5000명이 상근하는 대규모 중앙행정기관들을 보유하는 동시에 그 형태적 완성을 거의 마무리하게 된다. 둔산 신도시는 특히 단독주택 없이 대규모 아파트단지와 상가형 건물들이 즐비한 가운데 신도시 내부에 대전 대부분의 공공기관, 기업, 각종 대형·소형 공원, 문화예술의전당과 시립미술관 등을 갖추게 되면서 거주민 상당수가 만족해하는 자족형 도시로서의 조건 대부분을 갖췄다. 이어 2006년에는 지하철인 대전도시철도 1호선까지 개통되면서 대전은 우리나라 6대 도시인 대도시로서의 면모를 제법 자랑할 수 있게 됐다. 개시 60년 동안, 103년 동안 숨가쁜 여정을 달려온 것이다.



그렇다면 근대적 도시로서의 역사 103년, 시로 출발한지 60년을 맞은 대전은 어떠한 위상에 놓여 있을까. 우리나라 수많은 도시들 가운데 대전의 거주여건은 비교적 상당히 좋아 이에 관한 평가에서는 매년 10위 안에 든다. 하지만 도시들에게도 글로벌 경쟁력이 강조되는 요즘 타 도시들보다 앞서 발전할 수 있는, 다른 곳이 따라오기 힘든 전략은 있는지에 대해 시민들은 다소 회의적이다.

대전시는 개시 60년, 광역시 승격 20년을 맞은 올해 다양하고 대대적인 자축행사를 준비 중이다. 이런 행사를 통해 시민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는 한편 대전의 미래는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함께 논의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된다면 바람직한 일이다.

미래의 발전방향을 짚어보는 일은 과거와 현재에 대한 온전하고 깊이있는 검토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대전일보는 짧지 않은 시간을 지나온 대전의 구석구석을 깊이있게 재조명해보고 현재의 대전을 있게 한 과거, 그리고 원동력은 무엇이었는지 모색해보는 연중기획을 마련했다. 그동안 늘 익숙한 것이어서, 사소한 것이어서 제대로 살피지 않고 지나쳤던 면까지 다시 들여다보는 이 연중기획은 대전과 시민들의 미래를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기회를 갖게 할 것이다. <류용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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