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웅순의 우리 시조를 찾아서 - ˝오백년 도읍지를…˝ | |||
나라를 지키지 못한 충신은 오늘도 잠 못 이룬다 | |||
정종 2년(1400) 그의 나이 48세. 조정은 송도로 천도한 직후였다. 화려했던 고려의 서울, 송도를 둘러보았다. 그의 심경이 얼마나 참담했으면 이런 시조를 노래했을까. 길재에게 태상 박사(太常博士) 를 제수했으나 ‘신하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하여 벼슬을 사양했다. 조정에서는 지조와 절개를 가상히 여겨 조신(操身)을 허락하고 식읍을 내렸다. 야은은 식읍으로 받은 밭 100결에 대나무를 심었다. 그의 절개는 이랬다. 만고의 충절, 만인의 사표는 이를 두고 한 말인가. 조선 왕조 실록에 그의 충절 기사가 60여 차례가 넘었고, 그의 행실은 만인의 교과서‘삼강행실도’, ‘오륜행실도’에도 올랐다. 길재는 공민왕 2년(1353년) 경상도 선산군 고아면 봉계리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매우 영민했다. 8세때 부친이 어머니와 함께 임지로 떠나게 되자 혼자 외가에 남게 되었다. 어느날 남계(南溪)에서 가재를 잡았다. 어머니 생각에 석별가(石鼈歌)를 짓고는 슬피 울었다. 마을 사람들은 ‘시골에도 이런 아이가 있는 줄 몰랐다’면서 그의 영특함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그는 어렸을 때부터 효심이 깊었다. 10세 때에 도리사(桃李寺)에 들어갔다. 18세 때에 박분(朴賁)에게 논어와 맹자를 배웠고 송도에 올라가서는 성리학의 대가 이색과 정몽주의 문하에 들어갔다. 권근과도 사제의 연을 맺었다. 이들과의 만남으로 야은은 성리학의 일대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국자감에 들어가 생원시에 합격했고 사마시에도 올랐다. 학문과 더불어 덕행은 더욱 깊어져갔다. 권근은 ‘내게 와서 학문을 배우는 사람이 많지마는 길재가 독보’라고 말했을 정도이다. 길재는 31세에 신면의 딸과 결혼, 이듬해 부친이 별세하자 삼년상을 마치고 금주에서 송도로 돌아왔다. 거기에서 어머니를 모시며 명현들과 학문을 닦았다. 진사시에 급제했으나 학문에 뜻이 있어 청주목의 사록(司祿)을 사양했다. 이 때 태종과 동문수학했고 교분도 매우 두터웠으나 조선조 창업으로 이방원과는 길을 달리했다. 우왕 14년(1388)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때 길재는 반궁(태학관)에서 고려조의 운명을 근심하며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용수산 동쪽 담장(나라)은 기울고 미나리 밭(泮宮)가에 푸른 버들은 축 쳐졌네 몸은 비록 남다른 것 없지마는 뜻은 백이·숙제처럼 마치고 싶구나 고려의 충절을 지키고자 했다. 많은 귀족과 자제들이 다투어 그의 문하에 들어갔다. 두문동 3절사(節士) 조의생·배을서 같은 인물도 그의 문하에서 나왔다. 종사랑(從事浪) 문하주서(門下注書)에 올랐으나 38세 때에 모든 벼슬을 버리고 고향 선산으로 돌아가 학문에 몰두했다. 조정에서는 그에게 계림부 교수(鷄林附 敎授)와 안변 경사 교수(安邊 經史 敎授)에 임명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우왕이 하세하자 삼년상을 입었고 그의 나이 40세에 고려의 멸망을 향리에서 조용히 맞았다. 본격적인 교육 활동을 전개했다. 경전 토론, 성리 심학에 모든 열정을 쏟았다. 양반, 미천한 자제할 것 없이 하루에 100명이 넘었다. 문하에는 성리학의 중추 사림파 김숙자가 있다. 절의 정신은 아들 김종직에게 전해지고 김일손, 김굉필, 정여립, 조광조, 조식으로 이어져 우리나라 선비 정신의 한 전형을 이루었다. 임진왜란의 의병도 이러한 정신에서 비롯되었다. 길재는 유학의 사표로 평생을 바쳤다. 그는 2남 3녀의 자녀와 수백명의 선비 제자를 남기고 1419년(세종 원년) 4월 12일에 67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절개는 백이·숙제요 효는 공문의 증자였다. 만세 충절의 사표였다. 금오산 동쪽 낙동강 서쪽 오포(烏浦)벌에 그의 묘소가 있다. 사림 각지에 수 많은 추모 서원과 비석들이 있으나 충청도에는 금산 부리리에 ‘청풍사’가 있고 계룡산 동학사에는 고려 삼은을 제향한 ‘삼은각’(三隱閣)이 있다. 길재의 고향 구미에는 절의의 사표 채미정이 있다. 물질 만능에 정신이 피폐해져가는 이 시대. 우리 선비 정신이야말로 반드시 되짚어보야할 무형의 자산이다. 나라를 지탱해왔던 우리의 선비 정신은 거대한 물질의 광풍에 온데 간데 없이 슬려갔다. 님이 가신지 600년이 되었다. 조선조 창업, 임진왜란, 구한말, 일제시대, 미군정, 좌우 갈등, 남과 북, 육이오, 군사 독재, 5.18 등의 낱말들이 주마등 처럼 스쳐갔다. 님이 참으로 그리운 때이다. ☞신 교수 약력 ▲1951년 충남 서천 출생 ▲대전고(1970), 명지대학원(1995) 졸업 ▲시집 ‘황산벌의 닭울음’, ‘나의 살던 고향은’ 등과 평론집 ‘무한한 사유 그 절제 읽기’ 등 펴냄 ▲한국현대문예비평학회 부회장, 한국시조시인협회 이사 등 역임 ▲현 중부대학교 유아특수교육과 교수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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