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웅순의 우리 시조를 찾아서]이 몸이 죽어가서… | |
세조의 ‘하여가’에 화답…단종을 향한 충의가 | |
- 성삼문 -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세조는 태종의「하여가」로 성삼문의 마지막 마음을 돌려보려고 했다. 위 시조는 세조의 「하여가」에 화답한 성삼문의「충의가」이다. 봉래산은 동쪽에 선인이 산다는 산 혹은 여름철 금강산을 말한다. 낙락장송은 가지가 축 늘어진 큰 소나무를 말한다.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온 천지를 덮을 때 홀로 푸르고 푸르리라’ 라고 대답한 것이다. 성삼문(태종18년, 1418-세조 2년, 1456)은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본관은 창녕, 호는 매죽헌이다. 충남 홍성 출생이다. 태어날 때 하늘에서 “낳았느냐?” 하는 소리가 세번 들려서 이름을 삼문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1438년(세종 20년) 식년문과 정과로 급제, 집현전 학사로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신숙주와 함께 명나라 요동의 음운학자 황찬을 13번이나 찾아갔으며 훈민정음 창제에 큰 공헌을 했다. 1455년 세조가 단종을 위협, 선위를 강요하자 그는 국새를 끌어안고 통곡했다. 이듬해 단종 복위를 꾀하다 처형되었다. 성삼문, 박팽년 등 집현전 학사들은 단종 복위를 위해 거사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세조 2년, 1456년 6월 1일 창덕궁 광연전에서 명나라 사신들의 송별 연회가 있었다. 이 날을 거사일로 잡았다. 유응부와 성삼문의 부친 성승이 세조의 경호 별운검을 맡기로 했다. 이 때 세조의 목을 단칼에 치고 권람· 한명회 등 심복들을 베어 단종을 복위시키자는 계획이었다. 뜻밖에도 세조는 장소가 협소하고 덥고 하니 별운검을 들이지 말라고 했다. 수상쩍게 생각한 한명회가 세조에게 아뢰어 그런 분부를 내리게 된 것이다. 운명은 그들의 편이 되어주지 않았다.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질은 계획이 탄로날까 두려워 장인 정창손에게 가 거사의 모든 비밀을 털어놓았다. 역사의 물줄기가 바뀐 것이다. 성삼문을 비롯한 박팽년·유응부·유성원·하위지·이개 등 관련자 전원이 체포되었다. 세조는 편전에 나가 직접 그들을 국문했다. 성삼문을 끌어냈다. “어찌하여 과인을 배반하였느냐?” “왕을 왕으로 복위시키는 것이 어찌 배반이라 할 수 있겠소?” “어린 상왕이 나으리께 왕위를 빼앗겼으니 신하로서 당연한 도리가 아니겠소?” “너는 왕을 왕이라 부르지 않고 나으리라고 불렀느니라. 너는 나의 녹을 먹고 있지않느냐? 그것이 배반이 아니고 무엇이더냐? ” “상왕이 계신데 나으리께서 어찌 나를 신하라 할 수 있겠소. 나는 나으리의 녹을 먹지 않았소이다. 나를 믿지 못하거든 내 집 곳간을 살펴보시오.” 세조는 대노했다. 쇠꼬챙이를 시뻘겋게 달궈 성삼문의 팔과 다리를 지졌다. 살점이 터지고 팔 다리가 찢겨졌다. 그래도 혹독한 고문은 계속되었다. 성삼문은 조금도 기가 죽지 않았다. 쇠가 식어지면 다시 달구어 오라고 소리쳤다. 참형되기 전에 읊은 시 한 수가 있다. 둥둥둥 북소리는 목숨을 재촉하는데 돌아서 바라보니 해는 서산에 지고 있구나. 머나먼 황천길엔 주막 하나 없고 이 내 몸 오늘 밤엔 뉘 집에서 묵었다 가리. 그의 부친 성승과 아들 다섯과 동생, 사촌들이 모두 죽었고 부인은 관비가 되었다. 곳간을 뒤져보니 세조에게 받은 녹비가 고스란히 쌓여있었다. 방안에는 불을 지핀 지 오래 되어 온기 하나 제대로 없고 거적대기 몇 개만 깔려있을 뿐이었다. 세조는 그래도 ‘일대의 죄인이요, 만고의 충신이다’라 하여 그의 충절에 감탄했다. 서울 노량진에 사육신 묘가 있고 그 일지를 묻은 묘가 충남 논산 은진에도 있다. 장릉(단종의 능)의 충신단에 배향되었고 영월의 창절사, 서울 노량진의 의절사, 공주 동학사의 숙모전에 제향되었다. 숙종17년, 1691년에야 관직이 회복되었다. 시호는 충문, 저서로 『매죽헌집』, 문집엔『근보집』이 있다. 외에 「절의가」 시조 1수가 전하고 있다. 선비 정신이란 무엇인가. 세상은 달라져도 영원히 달라지지 않는 것이 있다. 충과 효이다. 성삼문의 「충의가」는 ‘이 시대의 충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지금도 준열하게 묻고 있다. <시조시인·평론가·중부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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