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양,육대주 여행방

베트남 하노이와 캄보디아 씨엠립을 다녀와서(2009.10.11~ 10, 16)

럭키홍 2009. 12. 27. 10:38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가다.

 

 

 

대학 1학년 입학해서 얼마 되지 않은 1975년 4월 30일 호치민 군대가 이끄는 월맹군은 사이공을 함락 시키면서 지루하게 끌어 오던 월남 전쟁은 미군의 마지막  코브라 헬기가 사이공 하늘을 이륙하는  TV 화면이 지금도 머리에 생생하게 기억나고, 미국의 요청에 의해 우리의 맹호부대, 청룡 부대, 백마부대, 비들기 부대 용사들이 부산항에서 월남의 전쟁 지역으로 떠나는 우리 형님, 아저씨들의 모습이 선하게 떠오르는 먼 과거 속의 추억들이 뇌를 스쳐 지나간다. 

 

역사는 돌고 도는 것, 영원한 적도, 영원한 우방도 없는 역사의 흐름속에  미국의 요청이던간에 총을 맞대고 전쟁을 해야만 했던 질곡의 역사 앞에 세월의 흐름이 다시 끈을 이으고 협력하게 하는 것은 서로가 적대시 보다 상호 협력만이 지구상에 살아남기 위한 공존의 수단임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나라는 월남전으로 인한 한때의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1992년 베트남과 공식 수교를 체결하고, 김대중, 노무현 전대통령이 베트남을 방문했고, 이글을 쓰는 오늘(2009.10.21) 이명박 대통령도 베트남을 공식 방문중이다.

 35년이 지난 지금  베트남과 우리 나라의 관계는 교역량이 1992년 5억 달러에서 2008년 100억 달러로 늘어 났고, 이번 이명박 대통령이 방문하여 양국간에 종래의 21세기 포괄적 동반자 관계에서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구축을 위한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양국 교역 규모를 100억달러 수준에서 2015년까지 200억달러로 확대하고, 베트남이 국가 사업으로 추진하는 홍강 개발사업, 호찌민~ 나짱간 고속철도 복선화 등등 양국간의 경제 협력방안을 합의한다고 한다.

 

이렇게 활발하게 양국간의 협력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나는 옛날 맹호부대 아저씨들한테 위문편지 쓰던 추억을 뒤새기며 바나나와 열대의 더운 나라라는 짧은 지식만 갖고 베트남 하노행 비행기에 올랐다.

 

베트남은 인구8600만명, 한반도 보다 1.5배나 되는 넓은 국토와 다양한 광물자원을 보유한 유망신흥시장이자 미래 경제 대국으로 500여개의 우리나라 업체가 진출하여 활발히 사업을 하고 있고 있으며 2007년에는 우리나라의 세번째 투자 대상국이도 했다.

 

특히 베트남은 오랜 역사 속에 중국, 프랑스, 미국등으로부터의 수많은 외침을 물리치고, 민족의 독립과 자존을 지켜 낸 자긍심이 강한 민족으로 교육열 또한 대단해 인재대국으로의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베트남은 불교숭상과 유교적 전통문화가 면면히 흘러내려 사회주의 체제아래 있지만 국민들의 일상생활에서 우리와 같은 친근감과 아시아적 가치관이 묻어 나는 동질감을 느끼게 하는 국가이다.

 

우리 일행이 찾아 간  하노이 시는 중국 운남성과 가까운 북부지방으로  아열대 기후에 속하며 사계절이 있다한다. 1월 하순에서 4월에 결쳐 "므어쓰엉'이라는 안개비가 내리고 이떄는 아침 저녁으로 한국의 늦가을처럼 쌀쌀해지며 흐린날씨가 계속되고 우기가 가까운 5월~10월은 날씨가 덥고 비도 많이 내린다. 겨울(11월~2월)에는 체감온도 5도 까지 내려가므로 겨울옷 준비가 필요하다고 한다.  

 

지리적으로 인도차이나 반도 위치한 베트남은 남북으로 길게 이어진 나라이다. 수도 하노이 에서 호치민 까지 1750km 비행기로 2시간 정도 걸린다. 시차는 한국보다 2시간 느리고, 화폐는 동(dong) 이며 1불이 14000동 하나 관광객에겐 달러가 일상적으로 통하고, 전기 또한 220V,50Hz 라 면도기및 핸드폰 충전에 문제가 없었다. 언어는 베트남어가 있으며 프랑스어, 영어가 일부 통한다 한다.

베트남의 국민 소득은 2008년 기준으로 1060달러 수준이나 풍부한 해양유전과 다양한 광물자원,근면한  노동력으로 세계적 다국적 기업을 을 유치해 인도 차이나 반도의 경제허브로 부상하려는 노력이 여기저기서 보이는 듯 하다.

 

베트남에도 한류 붐이 불고 있다고 한다. 가장 인기 있는 배우가 장동건이라고 한다. 그래서 장동건의 베트남 입국이 거부된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다. 만일 장동건이 입국하는 즉시 사회혼란죄로 체포될 거라 한다. 공항 및 호텔이 수많은 팬들로 마비되기 때문이란다. 아마 장동건 결혼 소식이 전해지면 몇 명의 젊은이들이 세상을 떠날 거란 말에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10월 12일 월요일 대우 하노이 호텔에서 가까운 영화 ‘인도차이나’에서 여주인공이 은신하였던 아름다운 경치의 하롱베이로 버스를 타고 이동하였다. 유람선을 타고 유네스코 지정의 세계적 자연경관인 하롱베이의 그림 같은 주변 섬을 관광하고 석회동굴 감상한 후 티톱섬 전망대를 관람하려 했으나 날씨관계로 취소했다. 바다의 계림으로 불리는 하롱베이는 3천여 개의 크고 작은 섬으로 그 아름다운 경관으로 9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목록 가운데 자연공원으로 등록되었다.

  ‘하(Ha)’는 ‘내려온다’ ‘롱(Long)’은 ‘용’이란 뜻으로 하늘에서 내려온 용이 침략자를 맞아  하늘에서 이곳으로 내려와 입에서 구슬과 보석을 내뿜자 바다에 떨어지면서 갖가지 기암이 되어 침략자를 물리쳤다는 전설에서 유래한다.

대부분 섬은 거의 사람이 살지 않는 섬으로 파도가 없는 잔잔한 바다로 자연의 위대함을 실감하는 절경이었다. 우리에게는 영화 ‘인도차이나’와 ‘굿모닝 베트남’의 배경이 되었던 곳으로 낯설지 않았다.

  돌아오는 선상에서 중식으로 다금바리회를 먹었다. 마침 금영 노래방 기기가 실내에 설치되어 있어 식사와 함께 노래를 부르며 여흥을 즐겼다. 다금바리 회는 우리 나라에서는 너무 비싸 먹기가 쉽지 않은데 우리 일행은 사가지고 간 소주와 함께 한없이 먹었다. 다금바리라는 말의 뜻이 무엇이지 모르지만 .... 

 

하롱베이를 나와  하노이 시내의  호치민 박물관과 시내 구경을 하면서  하노이 시내에는 오토바이 천국 같았다. 오토바이 행렬이 흡사 물고기 떼처럼 유연했고, 무질서 속에서 질서가 느껴졌다. 마치 송사리떼가 흐르는 강물을 따라 헤엄쳐 가는 듯 유유히 하노이 시내를 달려가고 있다. 도로에서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부딪치면 자동차가 먼저 책임이 있다 한다.

헬멧을 쓰지 않으면 작년부터 즉석에서 오토바이를 압류하자 모두들 헬멧을 착용하고 다닌다고 한다. 이곳에서 교통사고로 죽으면 우리 돈으로 약 8만원 배상 받을 수 있다고 하니 아직은 목숨 값이 제 값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베트남에도 한때는 폭주족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폭주족은 5m 대나무로 사정없이 후려치는 특수경찰 앞에 바로 꼬리를 감췄다고 한다. 공산국가이기에 가능한 일이지만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서는 적절한 조치라고 생각했다.

 

하노이 시내 관광을 마친후 하노이 국제공항에서 2시간 비행 후 캄보디아 씨엡립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우기라서 그런지 장마비가 와서 공항 근처 저습지대가  침수가 된 곳도 비행기 안에서 볼수가 있었다.

앙크로왓 사원 근처 멋진 호텔에 여장을 풀고 저녁 식사를 멋지게 한 후 휴식에 들어 갔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혼자서 호텔 풀장에서 수영을 하고 아침을 가볍게 하고 앙코르왓 관광을 떠났다.

 

  씨엠립은 캄보디아 3번째 도시지만 5층 이하의 건물만 보였다. 유적지를 보호하기 위해 대형 비행기도 운행하지 않고 있다. 캄보디아는 베트남, 라오스, 태국과 접경한 앙코로 제국의 영광된 역사와 함께 전대미문의 킬링필드라는 오욕의 역사를 가진 나라이다. 국민 대부분 소승불교를 믿는 불교신자로 인구는 1,400만이고, 남한 면적의 2배 정도의 영토를 가졌다. 정부형태는 입헌군주제이나 국왕은 실권이 없고 전권을 총리가 갖고 있다. 특산물로는 상황버섯과 실크가 유명하다. 언어는 크메르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간단한 말로는 “섭섭아이(안녕하세요)” “어꾼(감사합니다)”을 배웠다.

  캄보디아의 연평균 기온은 25℃로 거의 일정하지만 습도가 80% 이상으로 높았다. 현재는 국제사회의 원조에 의존하고 있지만 메콩강 유역의 비옥한 농지, 서부지역의 울창한 삼림, 수많은 수산자원 등 풍부한 부존자원을 가진 잠재력이 큰 나라이다. 실제 이동하는 내내 주변은 황토여서 고향길 같은 친근함이 들었다. 하지만 아직 이 나라엔 발전소가 없어 태국에서 수전하고 있다니 걱정이 앞선다.


오토바이를 개조한 마차 ‘툭툭이’를 타고 공해 없는 숲길을 달리는 기분도 괜찮았다. 함께 툭툭이를 타고 늘 여유로운 행동과 포근한 마음의 소유자 조성우 회장님과 간단한 얘기를 나누며 자연 그대로의 캄보디아 길을 달려 앙크로왓 사원 옆 타프롬 사원에 들어 섰다.


 자야바르만 7세가 어머니께 바친 사원인 타프롬 사원과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앙코르왓을 관광했다. 앙코르왓은 수리바르만 2세가 만든 사원으로 세계 최대 석조 사원이었지만 왕국의 멸망과 함께 밀림 속에 잠들었다가 1860년 프랑스 동식물학자에게 발견되어 다시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유네스코에서 정한 세계문화유산의 하나로 현재 복원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석조건물의 웅장함뿐만 아니라 풍기는 신비함, 수려한 조각 등으로 그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부족하였다.

  다른 유적지와 달리 개보수하지 않은 타프롬사원은 자연 상태 그대로 보존하도록 결정되었다고 한다. 석조물 위로 곧게 솟은 이엥나무와 사원의 벽과 기둥을 휘감고 뿌리를 드러낸 스펑나무가 밀림 속에 묻혀있던 앙코르의 분위기를 물씬 느낄 수 있게 하였다. 

툭툭이 오토바이에서 내려 사원으로 걸어 들어가는 진입로에는 일부 어린이들이 물건을 팔려고 우리를 따라 붙기도 하고  길 옆 한군데에서는  몇명이 앉아서 우리 일행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그들의 악기로 아리랑을 연주하기에 나는 1달러를 던져 주고 지나갔다. 그들의 하루 벌이가 한국에서 온 관광객에게 아리랑을 연주하면서 여행객이  던져 주는 몇 푼 안되는 돈으로 생활을 이어가리라는 생각에 잠겨 보면서,

1960년대 우리 국민도 미군들에게 저렇게 했으리라는  생각에 우리가 이만큼 산다는 것에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10월21일 이명박 대통령은 베트남 방문을 마치고 캄보디아를 방문해 캄보디아 훈센 총리와 경제협력방안을 협의한다 한다. 특히 이대통령은 서울시장 시절 훈센 총리의 경제 고문으로 있었던 적이 있어 형님 동생하는 관계라서 이번 방문에 상호 협력방안을 협의하고 국제사회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로 합의 한다고 한다.

특히 우리가 툭툭이 오토바이를 타고온  앙코르 왓 진입로가  60년대 우리나라의 농촌 마차길 같은 자연 그대로 흙길인데 이길의 포장사업을 지원한다고 하니 가슴이 뿌듯하기도 했다.     

 

앙코르 왓 유적지를 관람하면서 쌓인 피로를 풀기 위해 우리 일행은 여행중 빼 놓을 수 없는 안마 시술을 받으러 갔다. 20세 정도 작은 여자들이(우리나라 같으면 대학에서 열심히 공부 하고 있을 학생들) 수건과 대야에 물을 들고 들어 와서 발을 씻고 안마를 해주었다. 그전날 중국여행에서 받았던  안마 보다 시원한 기분이 들었다. 이들에게는 20여불 미만의 안마 비용이 중요한 수입원이라 한다.

 

 다음날  크메르 왕국이 만든 인공 호수인 바라이 호수 관광을 했다. 덤으로 망고를 비롯한 현지 과일을 맛있게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때 졸졸 쫓아다니던 어린 소녀들의 “원 달라” 목소리가 아직도 귓전을 울리는 듯하다.

  다시 시내로 들어와 길 따라 달려온 곳, 왓트마이 사원은 크메르 루즈 집권 때 억울하게 학살당한 사람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사원이다. 75년 폴포트가 주도하여 4년 동안 700만 전체 인구 중 지식인과 기술인 200만 명을 무참히 학살한 인간의 잔악성과 정치 지도자의 한계를 실감했다. 공산당원이 집집마다 검문하여 손바닥이 부드럽거나 안경 쓴 사람이면 무조건 잡아들였다고 한다. 

가슴 아픈 캄보디아 역사 현장을 보고, 우리 나라의 6.25 사변을 생각해 보기도 하면서 저물어 가는 이국에서의 태양을 바라보며, 캄보디아에서의 저녁식사를 위해 식당을 찾았다.

 

압사라 민속춤 관람과 함께 맛있는 뷔페식 식사를 마치고 다시 호텔로 돌아와 샤워를 한후 시내로 한잔 하러 나갔다. “캄보디아에서 가장 기억나는 게 무엇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영화 ‘툼에이더’ 여 주인공 ‘안젤리나 졸리’의 “기억나는 건 씨엠립에서 맛있게 식사한 것”이란 한 마디에 유명해진 ‘Red Piano' 카페  근처의 맥주 집에서  함께 담소를 나누며 이국의 향취에 취해 고향의 그노래를 부르며 씨엠립의 밤을 즐겼다.

 

나라든 개인이든 조상을 잘 만나야 한다. 지구상에 가난한 나라를 보면 우라의 북쪽도 그렇고, 캄보디아도 그렇고 나라를 이끈 정권의 책임자가 어떻게 국민과 나라를 이끌어 나가느냐에 따라 먹고 사는 문제가 이렇게 비참하게 판가름 나는 현실이 오늘의 국제 사회인 것 같다.

  

캄보디아를 여행하면서 느끼게 되는 것은 부패한 정권은 결국 국민들에게 엄청난 상처만 주고 망한다는  역사의 교훈을  잊어서는 안된다 것이다. 북한의 김정일 정권도 역사의 심판을 두려워 한다면 인민을 위한 인민의 의식주를 해결 할 수 있는 방안이 최우선 되어야 할텐데 라는 혼자만의 생각도 해본다.

 

35년전의 월남 전쟁에 우리나라는 약 9년간 연인원 32만 명이 참전하여 참전용사 5천여 명이 잠든 곳이 바로 베트남이다. 베트남은 우리나라와 같은 남북 분단국이었으며 전쟁을 치른 나라여서 서로의 아픔을 공감하기에 더욱 선진국의 문턱에 선 대한민국을 배우고 싶어 한다는 걸 알았다.

 

 베트남 전쟁에 우리의 젊은 청년들이 목숨을 바친 결과로  우리는 70년대 고도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사실을 기억한다. 이제는 우리가 베트남의 경제성장에 기여할 때다. 서로 형제 국가가 되어 이끌고 도와가며 공존하는 관계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민족, 베트남의 아침은 머지않아 밝아 오리라. 격변의 역사로 속병 앓는 캄보디아의 모습에다 높은 교육열과 새로운 경제개방으로 역동하는 베트남의 문화를 직접 체험하고 돌아오는 가슴은 한 아름의 추억과 교훈을 안고 있었다.


 4뱍 5일간의 베트남, 캄보디아 여행을 마치고  밤 비행기에 몸을 싣고 인천을 향하며  한가지 느끼게 된 것은 나는 우리 조상과 지도자와 국민께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되고, 우리 아들들도 이곳에 와서 이곳 사람들의 삶이 어떤가를 직접 체험하는 경험을 갖도록 해서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스스로 배우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어느덧 비행기는 동방의 힘찬 고동을 품어내는  아름다운 조국의 푸른 하늘이 나를 반기는 듯 찬공기가 나의 얼굴을 스쳐 지나가는 듯 했다.

 

금번 여행에서 좋은 풍경과 추억과 우리 저편의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며  이제는 우리 나라도 지구 곳곳에 살고 있는 가난한 나라에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도와 주고, 협력하는 성숙한 모습을 보여야 할 때이고, 그렇게 하는 길이 선진국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 2009. 10.11~10.16  베트남, 캄보디아 여행을 다녀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