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산속 옹달샘(고전이야기)

한시/ 山居秋暝

럭키홍 2012. 7. 19. 03:56

<山 居 秋 暝> - 王 維 作
空山新雨後
天氣晩來秋
明月松間照
淸泉石上流
竹喧歸浣女
蓮動下漁舟
隨意春芳歇
王孫自可留

빈산에 내리던 비 이제 막 그친 후
저녁 되니 하늘 기운 가을이라네
밝은 달, 솔 사이로 비쳐들고요
맑은 물, 바위 위로 흐르고 있네
대숲이 떠들썩하니 빨래하고 가는 여인
연잎이 흔들리니 내려가는 고깃배
어느새 봄꽃은 시들었지만
王孫은 스스로 머물만하네
해설 및 감상
李白, 杜甫와 더불어 盛唐을 대표하는 시인 王維의 작품이다. 그는 21세에 과거에 급제하 여 관직에 나아갔으나 30대 중반, 그를 인정해 주었던 張九齡이 실각한 후 벼슬에 대한 열의 를 상실하고 山水間을 노닐었다. 드디어 40대 중반에는 長安 근교의 輞川에 別墅를 장만하고 본격적인 隱居生活로 들어갔다. 독실한 佛敎信者였던 모친 崔氏의 영향을 받아 그도 불교에 깊이 빠져들었다. 특히 31세 때 喪妻한 후에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며 화 려한 색깔의 옷을 입지 않고 기름진 음식도 먹 지 않았다고 한다. 輞川 別墅를 마련한 후로는 비록 관직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半官半隱의 생 활을 이어가면서 아름다운 山水詩를 많이 창작 했다. 이 詩는 輞川生活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되 는데, 왕유의 산수시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비 온 후 산촌의 가을 저녁 풍경을 그리고 있다. 1련은 산중의 景色을 전체적으로 眺望하고 계절과 시간을 밝혔다. 2련에서는 산중의 밤풍경을 구체적으로 그 려놓았다. 소나무 사이로 달빛이 쏟아져 들어 오고 바위위로 맑은 물이 흐른다. 밤이라 물이 보이지 않았을 터이지만 맑은 물이 달빛을 받 아 반짝이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비가 내린 후라 고요한 산중의 물소리가 더욱 크게 들렸 을 것이다. 2련이 산중의 경물을 묘사한 반면 3련은 산 중의 인물을 그리고 있다. 빨래하고 돌아가는 부녀자들과 어부들이다. 이 인물들은 산촌에 사는 평범하고 소박한 사람들이고 이들의 행동 도 매일 반복되는 극히 일상적인 일들이다. 산 촌에서 自足하게 살아가는 이들도 자연의 일부 이다. 이익을 위하여 서로 다투고 권력 때문에 시기하고 모함하는 바깥세상의 사람들과는 달 리 순박하게 사는 사람들이다. 자연과 어울려 즐겁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왕유는 무한한 애정 을 표하고 있다. 2련과 3련은 절묘한 對句로 유명하다. 3,4구 는 “비친다[照]”, “흐른다[流]”라는 동사로 끝나 는 반면에, 5,6구는 “빨래하는 여인[浣女]”, “고 깃배[漁舟]”라는 명사로 끝난다. 자칫 밋밋해지 기 쉬운 律詩의 對句에 변화를 준 것이다. 또 한 3구는 보이는 것, 4구는 들리는 것, 5구는 들리는 것, 6구는 보이는 것을 묘사했다. 이렇 게 시각과 청각을 교체시킴으로써 예술적 효과 를 극대화 하고 있다. 3련의 묘사 역시 탁월하다. 가을날 밤중이기 때문에 시인의 눈에는 빨래하고 돌아가는 아낙 네들과 고깃배가 보이지 않는다. 대숲에서 떠 들썩하게 들리는 말소리, 웃음소리로 아낙네들 의 존재를 짐작하고, 연잎이 흔들리는 것을 보 고 고깃배가 그 사이로 지나간다는 것을 짐작 한다. 적막한 가을밤, 산촌의 경물과 인물이 한 데 어우러져 그윽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1련에서 3련까지는 敍景이다. 아무런 꾸밈없 이 平淡하게 산중의 경치를 묘사한 후 마지막 련에서 자신의 감회를 펼치고 있다. 즉 抒情이 다. 지금은 가을이라 화려했던 봄꽃은 다 시들 었지만 그래도 이곳에 “머물 만하다”고 말한다. 여기서 ‘王孫’은 왕유 자신을 가리킨다. 이 부분은 ≪楚辭≫의 구절을 거꾸로 이용 한 것이다. ≪楚辭≫ <招隱士>편에 “王孫兮歸來 山中兮不可久留[왕손이여 돌아오라 / 산중 에 오래 머물 수 없나니]”라는 구절이 있는데, ‘산중은 너무 적막해서 오래 머물 수 없으니 어 서 돌아오시오’라 하여 산중에 은거하는 왕손 을 부르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이 시에 서는 산중생활이 “머물 만하다”고 하여 번잡한 人事의 현장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심정을 함 축적으로 밝히고 있다. 이러한 산중생활에 대 한 애정이, 3련까지의 산중 경치와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