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유성온천" 변천사

럭키홍 2012. 8. 2. 11:19

공주 갑부가 개발한 대전지역 고급휴양지 어디
② '유성온천' 변천사
▲▲ 1970년대 유성온천로 전경

'대전은 우리나라에서 교통 편하기로 몇 째 안가는 곳으로 회덕군과 진잠군이 없어진 대신 대전이라는 고을로 되었답니다. (중략) 우리 대전의 명물로는 많기는 많지만 그 중에서도 한가지만 소개하리다. 대전에서 서쪽으로 계룡산을 향해 약 이십리를 가면 유성온천이 있는데 이 온천은 우리 조선에 유명한 온천으로 어떤 병이든지 큰 효력이 있다 함으로 심지어 만병수라는 별명까지 듣게 되었으니 이 어찌 우리나라의 유일한 보물이 아니겠습니까? 이 온천은 몇 해까지도 자유온천이었으나 어느 눈 밝은 일본인들의 소유가 되고 말았지요.' (1926년 12월 3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향토례찬내고을명물' 中) 대전의 명물로 손꼽히던 유성온천은 일제시대부터 고급휴양지로 개발되기 시작한다. 근대도시 형성 과정에서 휴양지로 형성된 만큼 전해지는 일화가 무궁무진하다. 일제시대에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기까지 변천사를 살펴봤다.



◇'공주 갑부' 김갑순, 고급휴양지로 개발=유성온천이 한적한 전원지대에서 온천지대로 개발된 것은 1907년이다. 유성에 정착한 스즈키라는 일본인은 봉명동 유성천 남쪽에 있는 온천탕 부근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1912년 '공주 갑부'로 유명한 김갑순이 그 땅을 사들여 개발한 후 그 이듬해 12월 본격적인 개업에 들어갔다. 당시 온천의 풍경은 한적한 연못에 까치다리와 반지하의 집이 있는 전형적인 일본식 온천의 모습이었다. 이에 1904년 대전역이 신설되고, 1913년 호남선이 개통되면서 더욱 많은 사람들이 찾게 된다.

1923년 남만주철도(南滿州鐵道)는 유성온천의 일부를 인수했는데 부지 내 건물을 신축하고 본격적인 경영에 뛰어들었다. 당시 경부선철도와 호남선철도의 열차시간 재조정이 있었는데, 유천면(柳川面) 등지에 임시정차장을 설치, 자동차를 이용하여 시간대 별로 철도여행객들을 유성온천으로 끌어들였다. 당시 대전면에서 유성온천까지의 요금은 50전, 공주에서는 1원 80전, 동학사에서는 60전을 받았다. 하루 숙박료는 1원에서 3원까지였다. 관광객의 반 이상은 일본인들이었다.

일본인이 경영하는 대표적인 온천장으로는 봉명관(지금의 계룡스파텔)과 만년장(지금의 리베라호텔)이 있었다. 1925년 개발된 봉명관은 일본 군인의 휴양소이자, 조선총독부 영빈관처럼 중요한 손님이 주로 묵는 고급 휴양지였다.

유성온천장을 세운 김갑순은 바로 옆에 있는 만년장, 봉명관과 경쟁하기 위해 유성호텔 구관 자리에 건물을 증축했다. 그는 1927년 7월 유성온천에 오락장을 신축하며 이를 축하하는 대대적인 행사를 열었는데 자동차왕복 승차권이 동봉된 초청장을 지역 유지들에게 보냈다고 한다. 이곳에서 당시 조선총독이었던 사이토가 자주 찾아와 쉬어 갔으며 이승만 초대 대통령도 이 온천장에서 머물렀다.

김갑순이 실질적인 소유주로 있던 (주)유성온천은 1940년대에는 총 자본금 20만원의 기업으로 성장하며 호황을 누렸다. 당시 김갑순의 주식보유량은 총 4000주 중 절반에 해당하는 2000주였다고 전해진다.

◇해방 이후도 명사 즐겨 찾는 명소로=해방 이후 만년장은 1958년 만년장호텔로 바뀌었고, 김갑순의 유성온천장 자리엔 1968년 최신식 유성관광호텔이 들어선다. 봉명관은 1945년 육군에서 인수해 군인 휴양소로 운영된다.

만년장에는 당시 정계 유력인사들이 자주 머무르며 온천을 즐겼다. 윤보선 전 대통령은 야당 후보시절 이곳을 자주 들렀으며 민주당 장면 총리도 묵었다 갔고, 이시영 초대 부통령도 6·25 전쟁 때 잠시 이곳에 머물렀다. 박정희 전 대통령도 만년장 단골이었는데 그와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도 전해진다.

5·16 군사정변이 일어난 1961년 유성 만년장을 찾은 박 전 대통령은 당시 충남도지사로 있던 정석모에게 만년장 권서정 사장을 찾아오라 지시한다. 육군 소장 시절부터 만년장을 애용했던 박 전 대통령은 직급이 낮았던 자신을 극진히 대접했던 권 사장에게 사례를 하고 싶었던 것. 당시 권 사장은 사업이 부도가 나서 빚쟁이들을 피해 태평동에 다락방을 얻어 살고 있었다. 박 전 대통령을 만난 권 사장은 소원이 뭐냐는 대통령의 질문에 살림집을 한 채 마련해 달라고 부탁한다. 박 전 대통령은 지금의 온천1동주민센터 자리에 300만원 상당의 집을 지어줬다. 빚쟁이에게 집을 뺏길 까봐 명의는 대덕군청에 근무하는 한 직원의 이름으로 했다. 권 사장은 정권이 바뀌고 집을 넘겨줄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유성온천은 해방 이후에도 유명 인사들이 즐겨 찾던 고급 휴양지로 그 명성을 이어갔다.

◇1970년대 이후 본격 관광상품화=규모가 작은 유성온천에 대중탕이 들어서면서 관광 상품화 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이후다. 기존에 있던 온천장은 자연적으로 나오는 온천수만을 사용하다 보니 목욕탕 규모가 작아 대규모 인원을 수용하기 어려웠다.

이에 1977년 대규모 온천탕인 홍인온천장이 오픈하면서 유성온천은 본격적인 상업화 시대에 들어서게 된다. 전 홍인호텔 사장인 민경용 대한적십자사 대전·충남지사장은 수십여년간 유성에서 온천을 파다 실패한 아버지 민홍기씨의 경험을 바탕으로 최신식 기계를 사들여 1977년 2월 12일 대규모 온천수를 파내는데 성공한다. 당시 하루 평균 3000명의 방문객이 방문할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홍인장은 1991년 호텔로 변모해 약 50명의 직원과 60개갸량의 객실, 연회장 등을 갖추고 숙박, 연회 등 유성관광특구에서의 역할을 소화해냈다.

이후 기존의 온천장이 현대적인 시설로 리모델링되고, 새로운 호텔이 잇따라 생기면서 이곳은 1960-1970년대 최고의 신혼여행지로 각광을 받는다. 지금도 유성온천은 전국의 수많은 온천 중에서도 역사와 전통면에서 단연 첫 손가락에 꼽히고 있으며 명물 온천 테마거리 조성사업과 볼거리, 즐길거리가 제공돼 대전의 새로운 브랜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정민아 기자 mina@daejonilbo.com

도움말=민경용 대한적십자사 대전충남지사장, 송백헌 대전시 시사편찬위원

참고서적=근대 사진엽서로 보는 100년전 대전 (2011년 대전시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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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성온천 봉명관

▲유성온천 운동장에서 일본 전통의상을 입은 방문객들이 운동을 즐기고 있다. 사진=대전시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