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 떨어진 자리 온수 나와 상처 씻은 후 병 완쾌 | |||
■ 유성온천 관련 기록·설화 | |||
또한 조선시대 '동국여지승람'과 '세조실록지리지' 등에 유성온천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성종(1481) 때 완성된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태조 2년(1393년)에 도읍을 계룡산 신도안으로 정하고 역사를 시작할 때 그 아들 태종이 이곳에 와서 목욕을 하고 지터벌에 진을 친 후 왕좌산에 올라서서 군사훈련을 봤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단종 2년 발간한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유성현 동쪽 5리 독지울(獨只亐)에 온천이 있는데 집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독지울'이 지금의 탕거리인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가장 최근의 기록으로 1936년의 한 기록에 따르면 유성온천은 1910년부터 일본인들에 의해 개발돼 1913년 가을에 처음 개장했다. 첫 온천장은 회사가 경영하는 욕조 4개와 특등욕장 등 2동이었다고 한다. 여관으로는 일본인만 출입하는 2개의 여관과 한국인과 일본인이 출입하는 2-3개의 여관이 있다고 한다. 유성온천에 관련된 설화는 이렇다. 백제시대 의자왕이 왕권을 잡자 나라에 먹구름이 들기 시작했다. 신라군이 백제 땅을 침범하는 횟수가 늘어났고, 백제 땅의 젊은이들은 모두 군사로 뽑혀가기로 되어 있었다. 유성에 살고 있는 한 어머니는 아들 하나만 믿고 살고 있었으나 아들이 군대에 들어가게 되자 걱정이 태산 같았다. 아들이 벌어 생계를 이어가던 이 집에 날벼락이 떨어진 것과 다름 없었다. 아들은 그간 열심히 벌어 모은 돈을 어머니 머리맡에 두고 새벽에 집을 떠났다. 그의 어머니는 슬퍼하면서도 아들의 무사안위를 위해 매일같이 빌었다. 아들은 밀려들어오는 적과 열심히 싸우다가 어느날 갑자기 날아오는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그는 신라군에 붙잡혀 포로가 됐고, 적진의 성터에서 돌을 나르게 됐다. 전쟁이 끝났는데 오지 않는 아들을 기다리던 어머니는 병이나 들어 눕게 됐다. 하루는 어머니가 누워있는데 꿈 속에 아들이 마을 앞 들판을 기어오는 꿈을 꿨다. 잠에서 깨어나 사립문 밖을 내다보니 정말 아들이 기어오고 있었다. 아들은 적진에서 모진 매를 맞으며 일 하다가 죽기를 각오하고 도망쳐 나온 것. 어머니는 좋은 약은 모두 구해다가 써봤지만 효험이 없었다. 그래도 자식을 구하기 위해 이른 아침에 밖을 나온 어머니는 집 앞 논길을 걷는데 날개를 다친 학 한 마리가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며 고통스럽게 우는 것을 봤다. 이상하게 여겨 가보니 학이 떨어진 자리에서 뜨거운 물이 나오고 있었다. 학은 다친 날개를 물에 적시더니 한참 파닥거리다가 하늘로 날아갔다. 어머니는 아들을 생각하고 물동이로 그 뜨거운 물을 퍼다 날라 아들을 목욕 시켰다. 며칠이 지나자 몸의 상처에 딱지가 지기 시작하더니 아들은 언제 앓았냐는 듯이 홀가분하게 일어나는 것이었다. 그 후 그의 어머니는 뜨거운 물이 나오는 곳에 움막을 짓고 여러 가지 병을 앓는 사람들을 목욕 시켰다. 병을 고친 사람이 많아지자 몸을 고치기 위해 전국 팔도에서 유성을 찾았다. 여기가 유성 온천의 시초라 하는데 지금의 봉명동 냇물 둑 아래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정민아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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