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명곡 "대전부루스"의 탄생

럭키홍 2012. 8. 2. 11:24

③ 명곡 '대전 부루스'의 탄생

1950년대 대전역 부근, 자정이 넘어가는 시각에도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있다. 목포로 가는 '대전발 0시 50분' 열차를 타러 온 사람들이다. 대합실 청소를 막 끝낸 열차 승무원은 피곤했는지 기지개를 쭉 폈다. 그런데 플랫폼에서 그의 눈에 어떤 장면이 포착됐다. 청춘남녀 한 쌍이 두 손을 마주잡고 애절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것.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목포행 0시50분 증기기관차가 들어오자 남자 혼자 올라탄다. "대전발 0시50분 목포행 완행열차가 곧 발차하겠습니다." 졸린 목소리의 안내방송이 울려 퍼지면서 목포행 완행열차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천천히 플랫폼을 빠져 나간다. 여자는 눈물을 흘리며 배웅하고 열차가 다 떠난 후에도 비를 맞으며 한참을 서 있다. 이것을 지켜보던 열차 승무원은 영감을 받아 후에 가사를 쓰기 시작한다. 이렇게 탄생한 곡이 그 유명한 '대전 부루스'다.



'잘있거라 나는 간다 이별의 말도 없이/ 떠나가는 새벽열차 대전발 0시50분/ 세상은 잠이들어 고요한 이밤/ 나만이 소리치며 울 줄이야/ 아- 붙잡아도 뿌리치는 목포행 완행열차/ 기적소리 슬피 우는 눈물의 플랫폼/ 무정하게 떠나가는 대전발 0시50분/ 영원히 변치말자 맹세했건만/ 눈물로 헤어지는 쓰라린 심정/ 아- 보슬비에 젖어가는 목포행 완행열차'

열차 승무원은 바로 작사가 최치수 씨다. 뒤에 아세아레코드 사장이 된 최치수는 경남 울산 태생으로 레코드 사에 들어오기 전에는 열차 승무원으로 일했다. 14년 넘게 열차와 희로애락을 같이 한 그에겐 열차에 대한 남다른 추억이 있었다. 그 경험을 살려 신신레코드 영업부장으로 있던 1956년 대전 부루스의 가사를 처음 썼다.

최씨의 가사를 받은 작곡가 김부해 씨는 부르스로 리듬을 정한 뒤 3시간여의 작업 끝에 곡을 완성했다. 가수는 부르스를 잘 부르기로 소문난 가수 안정애 씨로 결정했다.

1959년 발표한 이 곡은 한마디로 대박이 났다. 출반 3일만에 서울 지방 도매상으로부터 주문이 쇄도했다. 대전 부루스는 야간작업까지 강행, 신신레코드 창사 이래 가장 많은 판매량을 기록했고 작사, 작곡가, 가수에게 특별보너스와 월급인상 혜택이 돌아갈 정도였다고 한다.

대전 부루스는 1963년 가사의 첫 구절을 딴, 이종기 감독, 최무령, 엄앵란, 신성일 주연의 '0시 50분'이라는 영화제목으로 또 한번의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1983년에 조용필의 리메이크로 세상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곡의 유명세는 더 높아졌다. 현재까지 모임이 있을 때 술이 들어가면 누군가는 꼭 흥얼거릴 정도로 인기가 이어지고 있다.

가사에 등장하는 열차는 호남선 제33호 열차로 8시 45분 서울역을 출발, 대전에 0시 40분에 도착했다. 그리고 0시 50분에 다시 대전에서 목포로 떠나는 완행열차였다. 대전에서 목포를 잇는 호남선 전 구간이 개통된 것은 1914년이었으나, 1978년 대전도차장에서 서대전 구간의 복선화가 완료되기 전까지 호남선 열차는 대전역을 통과했다. 가사는 이때를 배경으로 쓰여진 것이다.

내용은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을 아파하고 서러워하는 내용이지만, 실제 1960년 이후, 개발독재 시대의 호남선은 가난과 이농으로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서민들의 애환이 어린 하나의 상징이었다. 이 열차를 주로 시용한 사람들은 대전역 인근 사장에서 광주리 물건을 팔던 농사꾼이거나 술에 얼큰히 취해 막차를 기다리던 지방사람들이었다. 방학철에는 캠핑이나 귀향하는 학생들로 새벽열차가 북적대기도 했다. 특히 이 열차는 만남과 이별의 장이기도 했다. 보슬비가 뿌려지거나 눈 내리는 밤, 이 열차에서 헤어지는 연인들의 애틋함은 한편의 서정적인 비가였다. 노래의 성공은 아마도 이런 사회적 아픔을 배경으로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일 것이다.

기다렸던 혹은 오지 말아야 할 막차가 지친 몸을 이끌고 들어오는 역의 실루엣은 작가들의 단골 소재이기도 하다. 아리랑, 관동별곡, 진달래 처녀 등의 많은 노래들은 만남과 이별, 귀향과 가출, 생성과 소멸의 상반된 이미지를 내포한 역을 내세워 1960년대 어려웠던 소시민의 애환을 달랬다.

0시50분 열차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노래가 발표된 지 1년만에 1960년 2월 대전발 3시05분 발차로 시간이 변경되면서 짧은 수명을 다했다.

레코드사 사장에까지 올랐던 최치수 씨와 김부해 씨는 이미 운명을 달리했고, 가수 안정애 씨만이 과거 영광을 뒤로 하고 생업에 전념하고 있다.

현재 대전역광장 한 켠에는 대전 부루스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작곡자와 작사가의 이름은 있으나 노래를 부른 가수 안정애의 이름은 빠져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가수 안정애가 조용필의 이름을 함께 새기지 않는다면, 자신의 이름을 넣지 말아달라고 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대전역 부근 허름한 선술집에선 지금도 쉰 목소리의 대전 부루스가 흘러나온다. 대흥동에는 동명의 선술집이 있는데, 간혹 시민단체, 예술단체 등이 주도해 이곳에서 '대전 부루스 부르기 콘테스트'가 열리기도 했다. 대전을 배경으로 한 대중가요 중 가장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지역색을 상징하는 곡을 부를 때 부산은 '부산갈매기', 전라도는 '비 내리는 호남선'을 꼽듯이 대전하면 '대전 부루스'를 떠올리게 됐다.

정민아 기자 mina@daejonilbo.com

참고서적=대전근대사연구초 1 (2011년 대전시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