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1919년 3.1운동의 근원지, 탑골공원에 가다

럭키홍 2014. 10. 31. 23:33

    

 

 

[현장취재] 1919년 3.1운동의 근원지, 탑골공원에 가다|

 

전체공개2014.03.20 17:31
            

 

 

                                       

               

               

1919년 3.1운동의 근원지, 탑골공원에 가다

 

 

 

대한민국 최초의 도심 내 근대 공원. 1919년 3.1운동의 근원지. 조선시대 원각사 터. 사적 제354호. 이 수식어들은 종로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는 탑골공원의 것입니다. 아마 종로에 가보신 분이라면 한번쯤은 지나치셨을 탑골공원은 언제부터인가 어르신들의 휴식공간으로 각인되면서 번화한 도심에서 섬처럼 느껴지고 있는데요. 오늘, 탑골공원에 들러 만세를 외치며 독립을 갈구했던 그 날을 느껴보았습니다.

 

 

 

 


탑골공원 자리는 고려시대 흥복사라는 사찰이 있었던 곳으로 1465년(세조 11년), 불심이 컸던 조선 세조에 이르러 2천여 명이 넘는 군사를 동원하고 가옥 200채를 사들여 도성 제일의 가람 원각사로 중건했습니다. 이 후 고종 34년인 1897년 도지부 고문인 영국인 브라운에 의해 공원으로 조성되어 1920년에 ‘파고다공원’이라는 이름으로 개원했으며, 1992년 5월 28일 옛 지명을 따 명칭을 탑골공원으로 개정했습니다. 조성 초기 탑골공원공원이라기보다 황실의 부속 시설에 가까웠다고 합니다. 1900년께 설치된 것으로 보이는 팔각정도 황실의 음악 연주회장으로 사용되었다고 하는데요. 1913년이 되어서야 일반인들에게 개방되었습니다.

 

 

 

 


탑골공원은 1919년 3.1 운동의 발상지로 처음으로 독립 선언문을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친, 우리 민족의 독립 정신이 살아 숨쉬는 유서 깊은 곳인데요. 주요시설로는 독립운동 봉화에 불을 당겼던 팔각정을 중심으로 국보 제2호인 원각사지 10층석탑, 원각사의 창건에 대해 기록되어 있는 보물 제3호인 원각사비 등의 문화재와 3.1 운동 기념탑, 3.1 운동 기록 부조, 의암 손병희 선생의 동상, 한용운 선생 기념비 등이 있습니다.


  

 

 


저도 근처를 지나간 적은 있지만 안에 들어가 본 것은 처음이라 공원 안에서 보이는 밖의 풍경이 낯설기도 했는데요. 봄비가 갓 지나간 후라 평소 공원에 많이 계시는 어르신들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삼일문을 통해 공원 안으로 들어가니 가장 먼저 눈길을 끈 것은 오른편에 위치해 있는 3.1운동 기념비였습니다. 오후에 있을 시 낭송 행사를 준비 중이라 기념비 위쪽에는 스피커가 설치되어 있기도 했는데요. 태극기를 들고 공중으로 손을 뻗고 있는 동상이 1919년 그 날의 모습을 생생하게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3.1운동 기념비 왼쪽에는 의암 손병희 선생의 동상이 있었습니다. 의암 손병희 선생은 동학의 제3세 교조로 1919년 민족대표 33인의 대표로 3.1독립선언을 주도하다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셨습니다. 이러한 선생의 뜻을 기려 1962년 정부에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기도 했는데요. 동상 앞에는 3월 1일에 다녀간 천도교 청년회의 꽃바구니가 놓여 선생의 넋을 달래 주고 있는 듯 했습니다.

 

 



 

다음은 1902년(광무6)에 탑골공원 안에 지어진 팔각형 정자, 팔각정을 둘러보았습니다. 장대석 기단 위에 둥근기둥을 세우고 기둥머리 부분은 물익공을 짠 후 기와지붕을 덮은 이곳이 바로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곳인데요. 저 계단 위에서 민중들을 지켜보며 독립선언서를 읽어내려 갔을 정재용 선생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이달의 보훈스타 기자단 기사 ‘1919년 3월 1일, 팔각정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다 - 정재용 선생’ 참조 http://cafe.naver.com/bohunstar/25558)

 



 

 

다음으로는 10개의 3.1운동 기록 부조를 둘러보았습니다. 원각사지 10층 석탑 뒤 쪽으로 난 길을 따라 10개의 부조가 자리 잡고 있었는데요. 여러분께도 하나하나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삼일정신 찬양비

 

젊은이들이여 보라. 한국의 지성 높은 젊은이들이여. 정의와 자유를 수호하는 이 나라의 주춧돌인 청년 학생들이여. 이곳에 걸음을 멈추고 가슴에 손을 얹어 고요히 주위를 살피고 둘러보라. 민족자결의 고함치는 독립만세소리 그대의 귀에 쟁쟁하리라. 추상 열일같은 천고의 의기가 그대의 가슴에 용솟음치리라.

 

아아 젊은이들이여 이 땅을 길이길이 수호하여 자손만대에 영원히 간직하라. 이곳은 1919년 3월 1일 그대들의 선배 젊은이들이 일인총독의 총칼아래 희고 푸른 민족정기를 무지개같이 창공에 뿜어 삼십삼인의 지도자와 함께 인간의 자유과 국가의 독립을 정정당당하게 선포하고 민족자결을 외쳤던 삼일민족운동의 성스러운 발상지다. 자주독립을 선포한 젊은이들은 맨주먹 빈손으로 고함치며 거리로 내달렸다. 남녀노소 국민들은 뒤를 받쳐 성난 물결같이 대한독립만세를 높이 불러 하늘땅을 뒤엎었다. 백수항전의 흰 물결아,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 민족자결의 고함소리에 백두산도 우쭐대고 동해물도 끓었어라. 일경도 넋을 잃고 총독도 떨었어라. 한 식경 뒤에야 일병은 비로소 총칼을 들고 우리들을 쏘고 찔렀다. 비웃두룸 엮듯 감옥으로 묶어갔다. 피흘려 쓰러진 이 거리마다 즐비했네.

 

아아 거룩한 한민족의 백수항전이여. 탑골공원의 봉화가 서울장안에 높이 들려지니 삼천리 강산 방방곡곡엔 산마다 봉화요, 동리마다 불바다였다. 일 년을 끌어온 팔도강산의 삼일만세대정신운동은 온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일제감옥에 투옥된 이 사만육천구백여명이요, 총칼에 쓰러져 죽은 이 칠천오백구명이요, 상한 이가 일만오천구십일명이었다.

 

아아 세계민족사상에 그 유래가 없는 일치단결된 대민족운동이요, 만고에 없는 민족의 서사시다. 오늘날 국가의 광복은 이 성스러운 민족운동의 결실이라 하겠다.

 

아아 젊은이들이여 이 정신을 이 땅과 함께 길이 간직하라.

 

1967년 12월 박종화 짓고 김충현 쓰다


 

 

▲1919년 3월 1일 오후 두시 탑골공원에서는 수천명 학생들이 정재용의 선언서 낭독이 끝난 뒤 대한독립만세를 높이 외치며 거리로 달려나가니 서울은 순식간에 감격과 흥분의 도가니가 되었고 그대로 파도와 같이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1919년 3월 2일 함경도 함흥 고을 민중들은 역사 깊은 만세교 위를 달리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왜경의 총칼이 번뜩일수록 만세소리는 더 높았고 그 중에서도 조영신이란 소년의 입을 찢었을 적에 더욱 더 거센 만세소리는 천지를 흔들었다.

 


 

 

 

 

1919년 3월 1일 정오 평양 기독교 신자들은 종소리가 울리자 장댓재 예배당으로 모여들었다. 고종황제 추모식을 마치고 이엉 거리로 달려 나가 천도교인들과도 합세하여 모두들 태극기를 들고 왜경의 총탄을 무릅쓰고 만세 시위를 했다.

 


1919년 3월 10일 오후에 황해도 해주에서는 문월선 등 기생들이 선봉이 되어 만세 시위를 하자 잔악한 기마경찰관들은 우리 민중을 마구 짓밟고 여자의 머리채를 말꼬리에 잡아매어 끌었지만은 그들은 왜경 앞에 조금도 굴하지 아니했다.

 

 

 

 

 


1919년 3월 10일 강원도 철원 고을 민중들은 학생들을 선두로 모두들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물밀 듯 거리로 몰려나와 독립만세를 높이 외쳤다. 악독한 왜경들은 총을 마구 쏘며 칼을 휘둘렀으나 죽음을 무릅쓰고 앞으로 행진할 뿐 이었다.



1919년 4월 십오일 오후 일본군 일개소대가 수원 제암리에 와서 예수교인들과 천도교인들을 교회당에 몰아넣고 총으로 난사하며 불을 질렀다. 불을 피해 나오는 부인은 칼로써 잔인하게 죽이고 창문으로 내어 보내는 아기들마저 죽였다.



▲1919년 3월 1일 천안 고을 병천시장에 수천명 군중이 독립선언식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 주모자 유중천 등 20여명은 현장에서 참살되고 유관순 처녀는 일경에 체포되어 감옥으로 넘어가 혹독한 고문에 항쟁하다 마침내 옥사했다.

 


 

 

 

 

1919년 3월 203일 경상남도 진주에서는 기생 수백명이 만세를 부르며 남강가를 행진햇다. 일본 경찰과 헌병들이 총검을 들고 찌르려했으나 그들은 아우성치며 우리는 논개의 후신이라 하고 애국가를 부르며 앞으로 용감히 달려갔다.


 

1919년 4월 3일 남원에서 일어난 일이 있다. 수천명 군민들이 질서정연하게 만세를 부르다가 방모씨 등 10여명이 일본경찰의 칼 아래 쓰러지자 그의 아내와 어머니마저 달려와 거기서 자결하여 독립을 이루라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1919년 3월 23일 저멀리 제주도에서도 남녀군중과 학생들이 함께 일어나 만세를 불렀다. 한라산 정기를 타고난 그들은 맨손으로 달려나가 일본경찰의 무서운 총칼과 싸워 피를 흘리면서도 행진을 계속하며 한 사람도 굽힘이 없었다.



이렇게 기록 설명을 읽으며 부조 하나하나를 자세히 살펴보고 있으니 비가 갓 그친 쌀쌀한 날씨에도 그 날의 뜨거움이 느껴지는 듯 했습니다. 그리고 이곳 탑골공원이 더이상 어르신들의 모임지가 아닌 역사와 가치가 살아 숨쉬는 아름다운 공원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지난 2월 서울 종로구가 3.1운동 95주년을 맞아 민족혼이 살아 숨 쉬는 명소로 탑골공원을 포함한 4곳을 선정했다고 하니, 여러분도 한 번쯤은 들러 1919년 3월 1일, 그 날을 체험해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