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곡의 한마당

아름답고 강렬한 선율미 자랑/ 안토닌 드보르작-체코

럭키홍 2015. 6. 2. 15:18

아름답고 강렬한 선율미 자랑

체코 프라하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음악 도시 중에 하나이고 3개의 오페라 하우스를 보유하고 있으며 수 많은 콘서트 홀과 교향악단, 실내악단이 활동하고 있다. 해마다 5월 12일부터 6월 초까지 3주간 '프라하의 봄'이라 불리는 음악축제가 열리는데 모차르트, 베르디, 베토벤 등 세계적인 작곡가의 작품을 연주할 뿐만 아니라 드보르자크(Antonin Dvorak·사진), 야나체크(Leos Janacek) 등 체코를 대표하는 음악가들의 작품도 많이 연주된다. 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6년, 독일로부터 독립한 체코는 독립을 축하하고 체코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창단 50주년을 기념해 프라하 음악축제를 개최했다.

체코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드보르자크 프라하 근교의 넬라호제베스(Nelahozeves)에서 1841년 14남매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샘이 솟는 듯 음악을 창출해내는 능력을 가졌다는 면에서는 모차르트에 비할 수 있겠고, 가슴을 쓸어내는 아름답고 강렬한 선율미는 그보다 1살 위인 차이콥스키의 매력과도 견줄 만하다. 사실 음악가 중에서 평탄하고 행복한 삶을 살다간 작곡가는 그리 많지 않으며 안정적인 가정을 꾸린 작곡가도 손에 꼽을 일이다. 드보르자크는 음악가 중에서도 특히 행복한 가정 속에서 많은 작품을 남긴 작곡가이다.

드보르자크는 신동도 아니었고 음악가 집안도 아니었으며,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나 훌륭한 음악교육도 받지 못했다. 푸줏간집 장남으로 태어난 드보르자크는 가업을 이어받아야 했고, 푸줏간 자격증을 따기 위해 초등학교가 있는 소도시로 가게 됐는데 -당시 체코에서는 푸줏간에서 일을 하려면 자격증이 있어야 했다- 거기서 음악에 소양이 있던 독일어 선생을 만나 바이올린화성학 등을 배우며 음악에 눈을 뜨게 되었다. 드보르자크는 얼마 후 푸줏간 면허를 따게 되었는데, 서양음악사에서 유일하게 정육점 면허를 딴 음악가로 기록 되었다. 드보르자크는 자격증을 교부 받았지만 가업을 이어받을 생각이 없었고 음악에 대한 타오르는 열정으로 34세에 오스트리아 정부 장학금 시험에 응시했다. 심사위원이었던 브람스는 드보르자크의 독자적인 슬라브양식을 높이 평가해 1등으로 합격시켰다. 그 즈음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까지 하게 된 드보르작은 3곡의 교향곡과 최대 걸작중의 하나인 교향곡 4번을 작곡하게 된다. '현악세레나데'를 비롯한 '모라비아 2중창곡' 등 체코의 민족적 색채가 드러난 작품을 완성했고 브람스의 추천으로 '슬라브 무곡'을 출판하게 되어 일약 세계적인 작곡가로 발돋움 했다. 사실 드보르자크의 초기 작품은 독일음악의 영향에 있었으며 특히 바그너의 영향이 강했다. 체코가 독일의 지배 하에 있었던 것이나 드보르자크에게 음악을 가르쳤던 스승이 독일어 선생님 이었음도 영향이 있었으리라 본다. 그 후 체코 국민극장의 오페라극장 관현악단이 발족되면서 드보르자크가 비올라 주자로 활동하게 되었는데 스메타나의 작품을 체험한 후 전과 다른 음악적 행보를 걷게 된다. 관현악법에 대한 공부를 깊이 있게 하기 시작했고 자신만의 고유한 색채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브람스와의 만남이 첫 번째 행운이었다면 그의 마지막 행운은 50세에 찾아왔다. 영국 케임브리지에서 음악박사학위를 받으며 프라하음악원 교수로 초빙되었으나 드보르자크는 학식이 모자라 다는 이유로 교수직을 사양했다. 그런 그의 겸양은 오히려 계기가 되어 프라하 음악원 연봉의 25배나 되는 금액을 받고 뉴욕음악원의 원장이 되어 미국으로 입성하게 되었다. 3년 후 그리운 조국으로 돌아온 드보르자크는 프라하음악원의 예술학원장으로 선임되었고 제자들을 지도하며 작품 열을 불태웠다. 민족주의적 리얼리즘과 독일풍의 신고전주의를 절충한 그의 음악은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맞아 떨어졌고 세계적으로 환영 받는 작곡가가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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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윤 예술감독·목원대 작곡재즈학부 외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