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곡의 한마당

장애도 숱한 시련도 극복한 樂聖/베토벤

럭키홍 2015. 6. 2. 15:23

장애도 숱한 시련도 극복한 樂聖

2015-05-12 B2면기사 편집 2015-05-12 05:59:44

 

클래식 크루즈 - 루드비히 반 베토벤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에 하나인 본(Bonn)은 20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녔다. 라인강변을 끼고 있는 본에서 1770년 음악 역사의 획을 근 작곡가 루드비히 반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1770-1827·사진)이 태어났다.

불룩 나온 배, 커다란 머리에 무성한 잡초 같은 두발, 방안 구석구석에 구겨 던진 오선지와 여기저기 말라비틀어진 빵 조각, 도무지 악성(樂聖)의 서재라고는 느낄 수 없는 베토벤의 집. 어릴 때부터 음악적인 재능을 보인 베토벤이었지만 이미 모차르트의 천재성에 놀란 사람들은 베토벤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베토벤의 아버지는 궁정악장이었지만 실력이 출중한 편이 아니어서 자신의 음악적 욕망을 아들을 통해 실현하고자 했다. 어린 아들을 유명하게 만들기 위해 나이까지 2살 속이고 방에 가두어 놓고 하루 종일 피아노를 치게 하는가 하면 주어진 시간 안에 과목을 마스터하지 못하면 끼니도 굶기는 등 그 방식이 너무 가혹한 것이었다. 보통 아이라면 시련을 못 이겨 음악을 포기했을 법도 한데 베토벤은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음악적 재능을 더욱 발전시켜 10살에는 작곡까지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알코올 중독은 더욱 심해졌고 가세는 더 기울어 학교마저 그만두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이 초등학교 중퇴의 학력에도 어떤 학자들에게도 뒤지지 않는 교양을 쌓은 것은 끊임없는 열정과 넘치는 학구열로 그가 만난 많은 선생의 가르침을 제대로 섭취했으며 문학, 철학, 역사 등 여러 분야의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정보를 얻고 지식을 쌓아갔기 때문이다.

베토벤은 자존심이 강하기로 유명했는데 그 당시의 음악가는 예술가로서의 독립된 가치보다 대부분 궁정이나 귀족의 밑에서 돈을 받고 일하는 악사의 신분이었다.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린 베토벤이 사랑했던 여인들과 결혼까지 가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도 역시 신분상의 격차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한 번은 베토벤이 귀족들 모임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는데 사람들이 음악에 귀 기울이지 않고 술, 담배를 하며 떠들자 갑자기 피아노 뚜껑을 닫고 일어서서 "음악을 모독하지 마시오"라고 말하고 나가버린 일화가 있다. "나는 예술가이며 창조자다. 따라서 왕족, 귀족보다 더 고귀하다"고 호언하는 등 베토벤이야말로 굳건한 예술가적 기질의 소유자로서 자기 권리를 굽히지 않고 예술가로서의 자존감을 지킨 음악가였다.

베토벤이 작곡한 32개의 피아노 소나타는 피아노 전공생들에게 신약성서와도 같은 존재이며 9개의 교향곡은 전시대를 통틀어 교향곡의 금자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욱이 마지막 교향곡인 9번 '합창교향곡'은 성악과 기악을 결합시킨 교향곡의 정점을 보인 작품이다. 베토벤은 행사나 의식의 반주나 사교수단으로 사용된 음악을 인간의 사상과 철학을 담아 표현한 작품으로 승화시킨 작곡가이다.

그의 음악인생에 어두움을 드리운 치명적인 귓병은 24세쯤, 창밖에 새소리와 가까이서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말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절망으로 다가왔다. 청력을 잃어가는 상황에서도 그는 음악계에 당당한 존재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고 피아노 연주에 있어서도 그를 능가할 자가 없을 정도였다. 또한 '운명', '전원'같은 굵직한 교향곡들을 작곡해 냈으며 '합창'교향곡은 청력을 완전히 잃은 상황에서 탄생된 곡이다. 베토벤은 청각 상실뿐만 아니라 위장질환, 간경변증, 황달에 수종까지 겹쳐 상당히 고통스런 일생을 살았지만 음악을 포기하지 않고 자신에게 다가온 운명과 맞서 싸우며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대작들을 만들어 낸 것이다. 자신의 삶과 작품으로 시련을 맞은 사람들에게 용기와 고통에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준 그를 우리는 '악성', 즉 '음악의 성인'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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