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및 명글의 고향

오세영 시 모음 (55편)

럭키홍 2018. 2. 1. 14:25

오세영 시 모음 5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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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오세영

1월이 색깔이라면
아마도 흰색일 게다
아직 채색되지 않은
신의 캔버스
산도 희고 강물도 희고
꿈꾸는 짐승 같은
내 영혼의 이마도 희고

1월이 음악이라면
속삭이는 저음일 게다
아직 트이지 않은
신의 발성법
가지 끝에서 풀잎 끝에서
바람은 설레고

1월이 말씀이라면
어머니의 부드러운 육성일 게다
유년의 꿈길에서
문득 들려 오는 그녀의 질책

“아가 일어나거라
벌서 해가 떴단다.”
아! 1월은
침묵으로 맞이하는
눈부신 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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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오세영

'벌써'라는 말이
2월처럼 잘 어울리는 달은 아마
없을 것이다.

새해 맞이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월,
지나치지 말고 오늘은
뜰의 매화 가지를 살펴보아라.

항상 비어 있던 그 자리에
어느덧 벙글고 있는 꽃,
세계는
부르는 이름 앞에서만 존재를
드러내 밝힌다.

외출을 하려다 말고 돌아와
문득 털외투를 벗는 2월은
현상이 결코 본질일 수 없음을
보여 주는 달,
'벌써'라는 말이
2월만큼 잘 어울리는 달은
아마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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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오세영

흐르는 계곡 물에
귀기울이면
3월은
겨울옷을 빨래하는 여인네의
방망이질 소리로 오는 것 같다.

만발한 진달래 꽃숲에
귀기울이면
3월은
운동장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함성으로 오는 것 같다.

새순을 움 틔우는 대지에
귀기울이면
3월은
아가의 젖 빠는 소리로
오는 것 같다.

아아, 눈부신 태양을 향해
연녹색 잎들이 손짓하는 달, 3월은
그날, 아우내 장터에서 외치던
만세 소리로 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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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오세영

언제 우리 소리 그쳤던가,
문득 내다보면
4월이 거기 있어라.
우르르 우르르
빈 가슴 울리던 격정은 자고
언제 먹구름 개었던가,
문득 내다보면
푸르게 빛나는 강물,
4월은 거기 있어라.
젊은 날은 또 얼마나 괴로웠던가,
열병의 뜨거운 입술이
꽃잎으로 벙그는 4월.
눈 뜨면 문득
너는 한 송이 목련인 것을,
누가 이별을 서럽다고 했던가.
우르르 우르르 빈 가슴 울리던 격정은 자고
돌아보면 문득
사방은 눈부시게 푸르른 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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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오세영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부신 초록으로 두 눈 머는데
진한 향기로 숨막히는데

마약처럼 황홀하게 타오르는
육신을 붙들고
나는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아아, 살아있는 것도 죄스러운
푸르디푸른 이 봄날,
그리움에 지친 장미는
끝내 가시를 품었습니다.

먼 하늘가에 서서 당신은
자꾸만 손짓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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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오세영

8월은 분별을
일깨워주는 달이다.

사랑에 빠져
철없이 입맞춤하던 꽃들이
화상을 입고 돌아온 한낮,
우리는 안다.

태양이 우리만의 것이 아님을,
저 눈부신 하늘이
절망이 될 수도 있음을,
누구나 홀로
태양을 안은 자는
상철 입는다.

쓰린 아픔 속에서만 눈뜨는
성숙,
노오랗게 타 버린 가슴을 안고
나무는 나무끼리
풀잎은 풀잎끼리
비로소 시력을 되찾는다.

8월은
태양이 왜,
황도(黃道)에만 머무는 것인가를
가장 확실하게
가르쳐주는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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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2

    오세영

우리 모두
시월의 능금이 되게 하소서.
사과알에 찰찰 넘치는 햇살이
그 햇살로 출렁대는 아아, 남국의 바람.
어머니 입김 같은 바람이게 하옵소서,
여름내 근면했던 원정(園丁)은
빈 가슴에 낙엽을 받으면서, 짐을 꾸리고
우리의 가련한 소망이 능금처럼
익어갈 때,
겨울은 숲속에서 꿈을 헐벗고 있습니다.
어둡고 긴 밤을 위하여
어머니는 자장가를 배우고
우리들은 영혼의 복도에서 등불을 켜드는 시간,
싱그런 한 알의 능금을 깨물면
한 모금, 투명한 진리가, 아아,
목숨을 적시는 은총의 가을.
시월에는 우리 모두
능금이 되게 하소서.
능금알에 찰찰 넘치는
햇살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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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

     오세영

무작정
앞만 보고 가지 마라.
절벽에 막힌 강물은
뒤로 돌아 전진한다.

조급히
서두르지 마라.
폭포 속의 격류도
소紹에선 쉴 줄을 안다

무심한 강물이 영원에 이른다.
텅 빈 마음이 충만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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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들녘에 서서  

       오세영                                    

사랑으로 괴로운 사람은
한 번쯤
겨울 들녘에 가 볼 일이다
빈 공간의 충만,
아낌없이 주는 자의 기쁨이
거기 있다.
가을걷이가 끝난 논에
떨어진 낟알 몇 개

이별을 슬퍼하는 사람은
한번쯤
겨울 들녘에 가 볼 일이다
지상의 만남을
하늘에서 영원케 하는 자의 안식이
거기 있다
먼 별을 우러르는
둠벙의 눈빛

그리움으로 아픈 사람은
한번쯤
겨울 들녘에 가 볼 일이다
너를 지킨다는 것은 곧 나를 지킨다는 것,
홀로 있음으로 오히려 더불어 있게된 자의 성찰이
거기 있다
빈들을 쓸쓸히 지키는 논둑의 저
허수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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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일기(日記)
    
        오세영

틀에 끼인
한 장의 사진 속에 평안이 있다.

아내의 싱싱한 머리카락 사이에
여름 햇빛들이 수런대고
철없는 어린것이 물장난을 치고

액자 옆에는 시들어 버린 꽃, 또는
고개를 숙인 인형,
고개를 숙이고 바라보는 해안엔
어부가 호올로 그물을 깁는다.

찢어진 생활의 한 컷을 넘기면서
1971年 1月4日,
날씨, 흐리다.
온종일 라디오를 들으며
편지를 쓰고 찢었다.

얼어붙은 시간의 저쪽에서
철없는 어린것이 물장난을 치고
생애의 슬픔을 건너온 바닷바람이
물거품을 밀어 올린다.

틀에 끼인 한 장의 사진,
그 속의 평화,
그 속에 잠든 아내의 얼굴,
흰 파도에 부서지는
여름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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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한나절

      오세영

눈 올 듯 말듯
햇빛 날듯 말듯

포장마차 집에서 막소주 한잔, 꽃가게 가서 실없는
농담, 시계방 물끄러미 들여다보기, 돌아와서 눈물 찔끔,
그리고 다시 또 소주 한잔,

행여 동백꽃 실려올까,
불현듯 달려가 본 간이역 플랫폼.
남녘에서 오는 열차는 멎지 않고

오늘도 벌써 해 저무는데,

우체부 올 시간은 지났고
아직도 누군가
올 듯 말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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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

           오세영

온 천지
혹독하게 얼어붙은 겨울 들판에
초가집 굴뚝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가냘픈 연기.

코로 따뜻한 숨을 내뿜는
그 살아 있음의
경건함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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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                                                  

      오세영

저녁에
팔 베고 누워
흐르는 계곡에 귀 기울이면
거기 카츄샤의 슬픈
사랑의 이야기 소리가 들린다.
꽃잎으로, 꽃잎으로 흐르다가
드디어 물이 된 그 사람.

자정에
목침을 베고 누워
솔잎 스치는 바람 소리에 귀기울이면
어린 월명이
누이와 이별하는 소리가 들린다.
갈잎으로, 갈잎으로 날리다가 어느덧
바람이 된 그 사람.

아제 아제 바라 아제
바라 승 아제
모지 사바하.
이 무슨 부질 없는 독경 소린가.
이 무슨 부질 없는 목탁 소린가.

새벽에
무릎을 곧추세우고 앉아
댓잎의 이슬 맺는 소리에 귀기울이면
출가하는 싯달다의
뺨에서 떨어지는 눈물 방울 소리가 들린다.
안개로, 안개로 흐르다가
이제 하늘이 된 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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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1 1                                                    

        오세영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절제와 균형의 중심에서 빗나간 힘
부서진 원은 모를 세우고
이성의 차가운
눈을 뜨게 한다.

맹목의 사랑을 노리는
사금파리여
지금 나는 맨발이다.
베어지기를 기다리는 살이다.
상처 깊숙이서 성숙하는 혼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무엇이나 깨진 것은
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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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이 그리워                                      

         오세영

그리운 이 그리워
마음 둘 곳 없는 봄날엔
홀로 어디론가 떠나 버리자.
사람들은
행선지가 확실한 티켓을 들고
부지런히 역구를 빠져 나가고
또 들어오고,
이별과 만남의 격정으로
눈물 짓는데
방금 도착한 저 열차는
먼 남쪽 푸른 바닷가에서 온
완행.
실어 온 동백꽃잎들을
축제처럼 역두에 뿌리고 떠난다.
나도 과거로 가는 차표를 끊고
저 열차를 타면
어제의 어제를 달려서
잃어버린 사랑을 만날 수 있을까.
그리운 이 그리워
문듣 타 보는 완행 열차
그 차창에 어리는 봄날의
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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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병(病)
  
       오세영

소녀는 질병을 앓았다.
기울어진 햇빛 속에서
아프리카를 생각하고 있었다.
뜨거운 열사熱砂의 지평地平을 달리는
한 마리 사자獅子,
소녀는 사랑을 꿈꾸었다.
잠 못 드는 밤엔
세계의 끝에서 숨쉬는
에프엠을 듣고
병든 지구에 내리는 빗물처럼
울 줄도 알았다.
러브스토리를 읽으며
인생과 예술이 술잔 속에서
페시미즘에 젖는 것을 보았다.
한 마리 사자獅子가 낮잠을 자는
아프리카 해안의 부서지는
푸른 파도.
소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다가오는 죽음을,
다만 하나의 희망이
어떻게 이 지상에 잠드는 것인가를
보고 싶었다.  
어둠이 내리는 거리,
사람들이 각기 등불을 켜 들 때도
소녀는 꿈을 꾸고 있었다.
꿈속으로, 꿈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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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

      오세영

도서관은 골 깊은 산이다.
등산하듯 층계를 올라
어두운 서가를 뒤진다.
이 골짜기는 역사 서가, 저 산봉우리는 철학서가,
저 능선은 과학 서가
고서는 이끼 낀 바위로 앉아 있고
사서는 칡넝쿨로 얽혀 있다.
이곳 저곳 걸으며
화두 하나 참구한다.

나는 누구일까
청노루, 백사슴 다 아는 산길에서
길을 잃고 망연히 헤매는데
앞에는 문득
깎아지른 듯 가로막고 서 있는 절벽.
그 까마득한 벼랑에 핀
꽃  
한 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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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오세영

나무가 쑥쑥 키를 위로 올리는 것은
밝은 해를 닮고자 함이다.

그 향일성(向日性)

나무가 날로 푸르러지는 것은
하늘을 닮고자 함이다.
잎새마다 어리는
그 눈빛.

나무가 저들끼리 어울려 사는 것은
별들을 닮고자 함이다.
바람 불어 한 세상 흔들리는 날에도
서로 부둥켜안고 견디는 그
따뜻한 가슴.

나무가 촉촉이 수액을 빨아올리는 것은
은핫물을 닮고자 함이다.
하나의 생명이 다른 생명에게 흘려 준
한 방울의 물

가신 우리 어머니가 그러하시듯
산으로 가는 길은 하늘 가는 길.

나무가 날로 푸르러지는 것은
하늘 마음. 하늘생각 가슴에 품고
먼 날을 가까이서 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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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처럼

     오세영

나무가 나무끼리 어울려 살듯
우리도 그렇게
살 일이다.
가지와 가지가 손목을 잡고
긴 추위를 견디어 내듯

나무가 맑은 하늘을 우러러 살듯
우리도 그렇게
살 일이다.
잎과 잎들이 가슴을 열고
고운 햇살을 받아 안듯

나무가 비바람 속에서 크듯
우리도 그렇게
클 일이다.
대지에 깊숙이 내린 뿌리로
사나운 태풍 앞에 당당히 서듯

나무가 스스로 철을 분별할 줄을 알듯
우리도 그렇게
살 일이다.
꽃과 잎이 피고 질 때를
그 스스로 물러설 때를 알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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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
    
      오세영

이제는 더 이상
느낌표도 물음표도 없다.
찍어야 할
마침표 하나.

다함 없는 진실의
아낌없이 바쳐 쓴 한 줄의 시가
드디어 마침표를 기다리듯
나무는 지금 까마득히 높은 존재의 벼랑에
서 있다.

최선을 다하고
고개 숙여 기다리는 자의 빈손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빛과 향으로
이제는 神이 채워야 할 그의 공간,

생애를 바쳐 피워 올린
꽃과 잎을 버리고 나무는
마침내
하늘을 향해 선다.

여백을 둔 채
긴 문장의 마지막 단어에 찍는
피어리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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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없음으로

          오세영

너 없음으로
나 있음이 아니어라

너로 하여 이 세상 밝아오듯
너로 하여 이 세상 차오르듯

홀로 있음은 이미
있음이 아니어라

이승의 강변 바람도 많고
풀꽃은 어우러져 피었더라만
흐르는 것 어이 바람과 꽃뿐이랴

흘러 흘러 남는 것은 그리움
아, 살아있음의 이 막막함이여

홀로 있음으로 이미
있음이 아니어라
☆★☆★☆★☆★☆★☆★☆★☆★☆★☆★☆★☆★
눈물    

    오세영

인생이란
기쁨과 슬픔이 짜아올린 집,
그 안에 삶이 있다.
굳이 피하지 말라. 슬픔을 …
묵은 때를 씻기 위하여 걸레에
물기가 필요하듯
정신을 말갛게 닦기 위해선
눈물이 있어야 하는 법,
마른 걸레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오늘은 모처럼 방을 비우고 걸레로
구석구석 닦는다.
내일은
우리들의 축일(祝日) 아닌가.
☆★☆★☆★☆★☆★☆★☆★☆★☆★☆★☆★☆★
더불어 살자

       오세영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양(羊)떼보다 더 간절한 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
봄이 오는 소리를 행여 놓칠까,
긴 겨울, 대지에 귀를 열고 견디는 양.
양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은 까닭에
결코 오는 봄을 의심치 않는다.

봄을 맞이하는 마음이
양떼보다 더 고운 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
먼데서 오는 그가 행여 추위에 떨까,
포근한 털옷으로 감싸 안은 양.
양은 항상 이웃과 더불어 사는 까닭에
남의 고통을 안다.

봄을 간직하는 마음이
양떼보다 더 순결한 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
그 찬란한 봄빛이 행여 더럽혀질까,
정결한 흰옷으로 갈아입고 강가에 서는 양.
양은 결코 서로 다투지 않은 까닭에
한 모금의 사랑도 나누어 마실 줄 안다.

대지에 귀를 대면 아아,
지금은 멀리서 봄이 오는 소리.
들린다, 어디선가 강물 풀리는 소리.
졸졸졸 어디선가 눈 녹는 소리.

온 누리 빛 밝은 그 날이 오면
온 누리 찬란한 새 봄이 오면
강물에 풀리는 얼음장처럼
우리도 하나되어 남북(南北)으로 흐르자.
우리도 양떼 되어 이제는
더불어 살자.  
☆★☆★☆★☆★☆★☆★☆★☆★☆★☆★☆★☆★
등산

       오세영

자일을 타고 오른다
흔들리는 생애의 중량
확고한
가장 철저한 믿음도
한때는 흔들린다

암벽을 더듬는다
빛을 찾아서 조금씩 움직인다
결코 쉬지 않는
무명(無明)의 벌레처럼 무명을
더듬는다

함부로 올려다보지 않는다
함부로 내려다보지도 않는다.
벼랑에 뜨는 별이나,
피는 꽃이나,
이슬이나
세상의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니다.
다만 가까이 할 수 있을 뿐이다.

조심스럽게 암벽을 더듬으며
가까이 접근한다
행복이라든가 불행 같은 것은
생각지 않는다
발붙일 곳을 찾고 풀포기에 매달리면서
다만
가까이
가까이 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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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 그늘 아래서                                    

      오세영

맑은 날,
네 편지를 들면
아프도록 눈이 부시고
흐린 날,
네 편지를 들면
서럽도록 눈이 어둡다.
아무래도 보이질 않는구나.
네가 보낸 편지의 마지막
한 줄,
무슨 말을 썼을까.

오늘은
햇빛이 푸르른 날,
라일락 그늘에 앉아
네 편지를 읽는다.
흐린 시야엔 바람이 불고
꽃잎은 분분히 흩날리는데
무슨 말을 썼을까.
날리는 꽃잎에 가려
끝내
읽지 못한 마지막 그
한 줄.
☆★☆★☆★☆★☆★☆★☆★☆★☆★☆★☆★☆★
무엇을 쓸까  

      오세영

무엇을 쓸까
탁자에 배부된 답지는
텅 비어 있다
전 시간의 과목은 "진실"
절반도 채 메꾸지 못했는데
종이 울렸다
이 시간의 과목은 "사랑"
그 많은 교과서와 참고서도
이제는 소용이 없다
맨 손엔 잉크가 마른 만년필
하나,
그 만년필을 붙들고
무엇을 쓸까
망설이는 기억의 저편에서
흔들리는 눈빛
벌써 시간은 절반이 흘렀는데
답지는 아직도 순백이다.
인생이란 한 장의 시험지,
무엇을 쓸까

그 많은 시간을 덧없이 보내고
치르는 시험은 항상
당일치기다
☆★☆★☆★☆★☆★☆★☆★☆★☆★☆★☆★☆★
바닷가에서

       오세영

사는 길이 높고 가파르거든
바닷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보아라
아래로 아래로 흐르는 물이
하나 되어 가득히 차오르는 수평선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자가 얻는 평안이
거기 있다

사는 길이 어둡고 막막하거든
바닷가
아득히 지는 일몰을 보아라
어둠 속에서 어둠 속으로 고이는 빛이
마침내 밝히는 여명
스스로 자신을 포기하는 자가 얻는 충족이
거기 있다

사는 길이 슬프고  외롭거든
바닷가
가물가물 멀리 떠 있는 섬을 보아라
홀로 견디는 것은 순결한 것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다운 것
스스로 자신을 감내하는 자의 의지가
거기 있다
☆★☆★☆★☆★☆★☆★☆★☆★☆★☆★☆★☆★
바람의 노래                                            

      오세영

바람 소리였던가.
돌아보면...
길섶의 동자꽃 하나,
물소리였던가.
돌아보면...
여울가 조약돌 하나,

들리는 건 분명 네 목소린데...
돌아보면 너는 어디에도 없고,
아무데도 없는 네가 또 아무데나 있는...
가을 산 해질녘은
울고 싶어라.

내 귀에 짚이는 건 네 목소린데...
돌아보면...
세상은
갈바람 소리.
갈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 소리.
☆★☆★☆★☆★☆★☆★☆★☆★☆★☆★☆★☆★
밤비

  오세영

밤에
홀로 듣는 빗소리.

비는 깨어 있는 자에게만
비가 된다.

잠든 흙 속에서
라일락이 깨어나듯
한 사내의 두 뺨이 비에 적실 때
비로소 눈뜨는 영혼.

외로운 등불
밝히는 밤.
소리 없이 몇 천 년을 흐르는 강물.

눈물은
뜨거운 가슴속에서만
사랑이 된다.
☆★☆★☆★☆★☆★☆★☆★☆★☆★☆★☆★☆★
봄비

     오세영

꽃 피는 철에
실없이 내리는 봄비라고 탓하지 마라.
한 송이 뜨거운 불꽃을 터뜨린 용광로는
다음을 위하여 이제
차갑게 식혀야 할 시간,
불에 달궈진 연철도
물 속에 담금질해야 비로소
강해지지 않던가.
온종일
차가운 봄비에 함빡 젖는
뜨락의
장미 한 그루.
☆★☆★☆★☆★☆★☆★☆★☆★☆★☆★☆★☆★
상처
    
     오세영

쓰라리지만
소금물로 상처를 씻는 것은
염증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눈물이 타서 굳은
숯덩이, 소금은
슬픔을 아는 까닭에
남의 상처를 아무릴 줄 안다.
큰 파도가 작은 파도를 안아 올리듯
작은 슬픔은
큰 아픔이 위로하는 것,
그러므로 비록 쓰라리지만
우리
상처는 비누로 씻지 말고
소금물로 씻자.
비누는
쾌락의 때를 벗기는 데
써야 한다.
☆★☆★☆★☆★☆★☆★☆★☆★☆★☆★☆★☆★
새해 새날은

       오세영

새해 새날은
산으로부터 온다.

눈송이를 털고
침묵으로부터 일어나 햇빛 앞에 선 나무
나무는 태양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새해 새날은
산으로부터 온다.

긴 동면의 부리를 털고
그 완전한 정지 속에서 날개를 펴는 새
새들은 비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새해 새날이 오는 길목에서
아득히 들리는 함성
그것은 빛과 빛이 부딪혀 내는 소리
고요가 만들어 내는 가장 큰 소리
가슴에 얼음장 깨지는 소리

새해 새날은
산으로부터 온다.

얼어붙은 계곡에
실낱같은 물이 흐르고
숲은 일제히
빛을 향해 나뭇잎을 곧추세운다.
☆★☆★☆★☆★☆★☆★☆★☆★☆★☆★☆★☆★
슬픔                                                      

   오세영

비 갠 후
창문을 열고 내다보면
먼 산은 가까이 다가서고
흐렸던 산색은 더욱 푸르다.
그렇지 않으랴,
한 줄기 시원한 소낙비가
더렵혀진 대기, 그 몽롱한 시야를
저렇게 말끔히 닦아 놨으니.
그러므로 알겠다.
하늘은 신(神)의 슬픈 눈동자,
왜 그는 이따금씩 울어서
그의 망막을
푸르게 닦아야 하는지를,
오늘도
눈이 흐린 나는
확실한 사랑을 얻기 위하여
이제
하나의 슬픔을 가져야겠다.
☆★☆★☆★☆★☆★☆★☆★☆★☆★☆★☆★☆★
신념                                                      

      오세영

꽁꽁 얼어붙은 겨울 밭, 무우 하나
땅에 묻힌 채
강그라지고 있다.
돌아보면 텅 빈 들판, 강추위는 몰아치는데
분노에 일그러져 시퍼렇게 하늘을
노려보는 그 눈,

뽑혀 생명을 보전하다가
일개 먹이로 전락하기보다는
차라리
뿌리를 대지의 중심에 내리고
스스로 죽는 길을 선택했구나.

승산 없는 전투가 끝난 전선,
지휘관을 따라 부대는 모두 투항해버렸는데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다
비인 들녘에서 외롭게
총살당한
푸른 제복의 병사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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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 한 짝

       오세영    

진흙 털고,
먼지 털고,
해진 신발을 깁는다.

풀꽃을 밟았을까.
이슬냄새가 난다.
벌레를 밟았을까
쇠똥냄새가 난다.
돌멩이에 챈 신발 한 짝,

애증과 영욕의
하루는 저물었다.
지팡이여, 지팡이여,
돌베개의 꿈은
차구나.

웃음 털고
울음 털고
피곤한 육신이 잠드는
길섶.
해진 신발 한 짝
꿈꾸는 길섶.
☆★☆★☆★☆★☆★☆★☆★☆★☆★☆★☆★☆★
역두에서                                                

    오세영

우리는 단지
잠깐 쉬고 있을 뿐이다.
저무는 플랫폼
길은 영원으로 열려 있고
영원에 종점이란 없다.

쉰다는 것은 이별과 만남의 교차,
달리는 순간엔 모두가
하나다.

떠난 자를 미워마라
참으로 열심히 달려왔다.
긴 터널과 외로운 가교
복사꽃 피는 마을도 있었지만
폭풍우 치는 밤이 더
많았다.

이 세상은
승차와 하차로 이루어지는
평행선.

그 끝없는 레일을 달리며
우리의 이별은
만남을
다시 꿈꾼다.
☆★☆★☆★☆★☆★☆★☆★☆★☆★☆★☆★☆★
연기
    
        오세영

술에 취해서
실수한 경우가 더러 있을 것이다.
어른을 몰라보는 놈!

- 아른아른
  떠오르지 않는 생각,
- 어질어질
  분명치 않은 물상,
- 비틀비틀
  허공을 짚은 두 발,
- 흔들흔들
  무너져 내리는 중심,

바위나, 성벽이나, 궁전이나
이 지상을 연모하는 것들은 무엇이든
확고하지만
하늘로 가는 것은 그렇지
않다.
안개, 아지랑이 혹은 술기운이 거나한
개망나니.

술에 취해 비틀대는 사자를
본 적이 있는가,
네 발로 땅을 짚는 자들은
대지의 아들,
그들은 술을 들지 않는다. 그러나

두 발로 걷는 인간은
두 손으로 항상 하늘을 움켜
쥐고자 한다.
술잔을 들어라.
술은 하늘로 흐르는 물,
불타는 물의
연기.
하늘의 논리는 이룸이 아니라
깨짐에 있는 것이다.
☆★☆★☆★☆★☆★☆★☆★☆★☆★☆★☆★☆★
연꽃  

           오세영

불이 물 속에서도 타오를 수
있다는 것은
연꽃을 보면 안다.
물로 타오르는 불은 차가운 불,
불은 순간으로 살지만
물은 영원을 산다.
사랑의 길이 어두워
누군가 육신을 태워 불 밝히려는 자 있거든
한 송이 연꽃을 보여 주어라.
달아오르는 육신과 육신이 저지르는
불이 아니라
싸늘한 눈빛과 눈빛이 밝히는
불,
연꽃은 왜 항상 잔잔한 파문만을
수면에 그려 놓는지를
☆★☆★☆★☆★☆★☆★☆★☆★☆★☆★☆★☆★
열매

     오세영

세상의 열매들은 왜 모두
둥글어야 하는가.
가시나무도 향기로운 그의 탱자만은 둥글다.

땅으로 땅으로 파고드는 뿌리는
날카롭지만,
하늘로 하늘로 뻗어 가는 가지는
뾰족하지만
스스로 익어 떨어질 줄 아는 열매는
모가 나지 않는다.

덥썩
한 입에 물어 깨무는
탐스런 한 알의 능금
먹는 자의 이빨은 예리하지만
먹히는 능금은 부드럽다.

그대는 아는가.
모든 생성하는 존재는 둥글다는 것을
스스로 먹힐 줄 아는 열매는
모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
오월                                                      

        오세영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부신 초록으로 두 눈머는데
진한 향기로 숨막히는데
마약처럼 황홀하게 타오르는
육신을 붙들고
나는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아아, 살아 있는 것도 죄스러운
푸르디푸른 이 봄날,
그리움에 지친 장미는 끝내
가시를 품었습니다.
먼 하늘가에 서서 당신은
자꾸만 손짓을 하고
☆★☆★☆★☆★☆★☆★☆★☆★☆★☆★☆★☆★
원시(遠視)                                        

       오세영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답다.
무지개나 별이나 벼랑에 피는 꽃이나
멀리 있는 것은
손에 닿을 수 없는 것는 까닭에
아름답다.
사랑하는 사람아,
이별을 서러워하지 마라,
내 나이의 이별이란
헤어지는 일이 아니라 단지
벌어지는 일일 뿐이다.
네가 보낸 마지막 편지를 읽기 위해선
이제
돋보기가 필요한 나이,
늙는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멀리 보낸다는 것은
것이다.
머얼리서 바라다볼 줄을
안다는 것이다.
☆★☆★☆★☆★☆★☆★☆★☆★☆★☆★☆★☆★
이별의 말                                                

     오세영

설령 그것이
마지막의 말이 된다 하더라도
기다려달라는 말은 헤어지자는 말보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별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하는 것이다
"안녕"
손을 내미는 그의 눈에
어리는 꽃잎
한때 걱정으로 휘몰아치던 나의 사랑은
이제 꽃잎으로 지고 있다
이별은 봄에도 오는 것,
우리의 슬픈 가을은 아직도 멀다
기다려 달라고 말해다오.
설령 그것이
마지막의 말이 된다 하더라도.
☆★☆★☆★☆★☆★☆★☆★☆★☆★☆★☆★☆★
이별이란                                                
  
       오세영

어디에나 너는 있다.
산 여울 맑은 물에 어리는
서늘한 너의 눈매,
눈은 젖어 있구나.
솔 숲 바람에 어리는
청아한 너의 음성,
너는 속삭이고 있구나.
더 이상 연연해하지 않기로 했다.
이별이란 흐르는 강물인 것을,
이별이란 흐르는 바람인 것을,
더 이상 돌아보지 않기로 했다.
싸락눈 흩뿌리는 겨울 산방에
서러운 듯 피어오른 난 한 송이,
시방 너는 내 앞에서 울고 있구나.
☆★☆★☆★☆★☆★☆★☆★☆★☆★☆★☆★☆★
제자리

     오세영

급류(急流)에
돌멩이 하나 버티고 있다.
떼밀리지 않으려고 안간힘 쓰며
안간힘 쓰며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꽃잎처럼
풀잎처럼
흐르는 물에 맡기면 그만일 텐데
어인 일로 굳이 생고집을 부리는지.
하늘의 흰 구름 우러러보기가
가장 좋은 자리라서 그런다 한다.
이제 보니 계곡의 그 수많은 자갈들도
각각 제 놓일 자리에 놓여있구나. 그러므로
일개 돌멩이라도
함부로 옮길 일이 아니다.
뒤집을 일도 아니다.
☆★☆★☆★☆★☆★☆★☆★☆★☆★☆★☆★☆★
지구는 아름답다

       오세영
    
아름답구나
호수 루이스
에머랄드 색깔이라 하지만
어찌 보면 고려의 하늘색 같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이육사의 청포도색 같기도 한 너의
눈빛,
살포시 치켜뜬 자작나무 속눈썹 사이로
꿈꾸듯 흰 구름이 어리는구나.
태고의 만년설로 면사포를 해 두른 너 로키는
지구의 정결한 처녀,
내 오랫동안 이를 믿어왔거니
그 청옥한 눈매가
그 무구한 눈짓이
바로 병색임을 내 오늘 알았노라.
모든 독을 지닌 것은 아름다운 것,
모든 침묵하는 것은 신비로운 것,
산성비에 오염된 호수에서는
아무것도 살지 못한다.
결핵을 앓는 소녀가 아름다워지듯
아마존에서, 킬리만자로에서
폐를 앓는 지구는 더 아름답다.
박명한 미인처럼 아름답다.
☆★☆★☆★☆★☆★☆★☆★☆★☆★☆★☆★☆★
지상의 양식

       오세영

너희들의 비상은
추락을 위해 있는 것이다.
새여,
알에서 깨어나
막, 은빛 날개를 퍼덕일 때
너희는 하늘만이 진실이라 믿지만
하늘만이 자유라고 믿지만
자유가 얼마나 큰 절망인가는
비상을 해보지 않고서는 모른다.
진흙 밭에 뒹구는
낱알 몇 톨.
너희가 꿈꾸는 양식은
이 지상에만 있을 뿐이다.
새여.
모순의 새여
☆★☆★☆★☆★☆★☆★☆★☆★☆★☆★☆★☆★
진달래꽃
    
      오세영

입술은 타고
몸은 떨리고
땀에 혼곤히 젖은 이마,

기다림도 지치면
병이 되는가,
몸살 앓는 봄밤은 길기만 하다.

기진타가 문득 정신이 들면
먼 산 계곡의 눈 녹는 소리,
스무 살 처녀는 귀가 여린데

어지러워라
눈부신 이 아침의 봄멀미.

밤새 地熱에 들뜬 山은
지천으로
열꽃을 피우고 있다.

진달래.
☆★☆★☆★☆★☆★☆★☆★☆★☆★☆★☆★☆★
질그릇                                                    

      오세영

질그릇 하나 부서지고 있다.
질그릇의 밑바닥에 잠긴 바다가
조용히 부서지고 있다.
스스로 부서져 흙이 되는
저 흔들리는 바다.
질그릇에 담긴 生鮮의 뼈,
질그릇에 담긴 暴風,
질그릇에 담긴 空間,
그 空間 하나 스스로 부서지고 있다.
☆★☆★☆★☆★☆★☆★☆★☆★☆★☆★☆★☆★
착한 소

     오세영

시행의 마지막 구절을 막 끝내자
잉크가 다한 볼펜
기진맥진 원고지의 여백에
펄썩 쓰러져 버린다.
편히 쉬어라.
피어리어드는 내 눈물로 찍겠다.
돌아보면 너무도 혹사당한 일생.
경지는 다만 소만이 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 동안 참 많은 밭을 갈았구나.
땀과 눈물과
심장에 고인 마지막 한 방울의 피까지
아낌없이 쏟아내고 너는 지금
후회 없이 이승을 떠나는구나
내 시가 너를 따를 수만 있다면…
잘 갈아 씨 뿌린 밭 두렁에
거품을 문 채 쓰러진
착한 소 한 마리.
☆★☆★☆★☆★☆★☆★☆★☆★☆★☆★☆★☆★
텅 빈 나

      오세영

나는 참 수많은 강을
건넜습니다
강을 건널 때마다 거기엔
이별이 있었고
이별을 가질 때마다 나는 하나씩
내 소중한 것을 내주었습니다
헤엄쳐 건너면서
옷을 벗어주었습니다
뗏목으로 건너면서
보석들을 주었습니다
배로 건너면서
마지막 남은 동전조차 주어버렸습니다

나는 참 수많은 산들을
넘었습니다
산을 넘을 때마다 거기엔
이별이 있었고
이별을 가질 때마다 나는 하나씩
내 소중한 것들을 건네주었습니다
벼랑에 매달리면서 슬픔을 주었습니다
비탈에 오르면서 기쁨을 주었습니다
고개를 넘으면서는 마침내
당신에 대한 그리움까지도
주어버렸습니다

나는 참 수많은 산과 강을
넘고 건너왔기에
내겐 이제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고 더불어
당신께 드릴 것이 없습니다
나는 텅 비어 있으므로
지금 나는 내가 아닙니다
아무래도 나는 이제 아무 것도 아닌 나를
당신께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텅 빈 나를 더 반기실 줄
아는 까닭에....
☆★☆★☆★☆★☆★☆★☆★☆★☆★☆★☆★☆★
파도

     오세영

지우고 쓰고
쓰고 지우고,
파도가 밀려온다.
울고 웃고,
웃고 울고
한나절, 갯가에
빈 배 지키며
동,
서,
남,
북,
소금밭 헤매는 갈매기같이

지우고 쓰고,
쓰고 지우고,
萬里長書로 밀리는 파도.
☆★☆★☆★☆★☆★☆★☆★☆★☆★☆★☆★☆★
폭포

       오세영

흐르는 물도 때로는
스스로 깨지기를 바란다.

까마득한 낭떠러지 끝에서
처연하게
자신을 던지는 그 절망,
사람들은 거기서 무지개를 보지만
내가 만드는 것은 정작
바닥 모를 수심(水深)이다.

굽이치는 소(沼)처럼
깨지지 않고서는
마음 또한 깊어질 수 없다.

봄날
진달래, 산벚꽃의 소매를 뿌리치고
끝 모를 나락으로
의연하게 뛰어내리는 저
폭포의 투신.
☆★☆★☆★☆★☆★☆★☆★☆★☆★☆★☆★☆★
푸른 스커트의 지퍼

        오세영

농부는
대지의 성감대가 어디 있는지를
잘 안다.
욕망에 들뜬 열을 가누지 못해
가쁜 숨을 몰아쉬기조차 힘든 어느 봄날,
농부는 과감하게 대지를 쓰러뜨리고
쟁기로
그녀의 푸른 스커트의 지퍼를 연다.
아, 눈부시게 드러나는
분홍빛 속살,
삽과 괭이의 그 음탕한 애무, 그리고
벌린 땅속으로 흘리는 몇 알의 씨앗.
대지는 잠시 전율한다.
맨몸으로 누워 있는 그녀 곁에서
일어나 땀을 닦는 농부의 그 황홀한 노동,
그는 이미
대지가 언제 출산의 기쁨을 가질까를 안다.
그의 튼실한 남근이 또
언제 일어설지를 안다.
☆★☆★☆★☆★☆★☆★☆★☆★☆★☆★☆★☆★
한 줄의 시

     오세영

시가 되지 않은 것은 구겨서
휴지통에 버린다.
그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너를 버리는
배신의 아름다움,

인생이란 한 줄의 시,
버리는 것이 많아야 오히려 충만해지고
완전한 슬픔에 이르기 위해선 그 슬픔
괄호 안에 묶어야 한다.

행간을 건너뛰는
두 개의 콤마,
사랑과 이별의 줄넘기, 그러나 아직은
마침표를 찍을 때가 아니다.

오늘도 이별의 길목에서 돌아온 나는
원고지를 구겨
휴지통에 버린다.

이루어지지 않은 한 줄의 시.
☆★☆★☆★☆★☆★☆★☆★☆★☆★☆★☆★☆★
해바라기 꽃

       오세영  

꽃밭도 텃밭도 아니다.
울가에 피는 해바라기,
모든 꽃들이 울안의 꽃밭을 연모할 때도
해바라기는
저 홀로 울 밖을 넘겨다본다.
푸른 하늘이 아니다.
빛나는 태양이 아니다.
그가 바라보는 것은 산과 들
그리고 지상의 인간,
신(神)은 머리 위에 있지만
인간은 항상 그 앞에 서 있다.
모든 꽃들이 다투어 위로 위로 꽃잎을
피워 올릴 때
앞을 향하여 꽃눈을 틔우는
해바라기,
흔히 꽃 같은 처녀라 하지만
해바라기는
인간이 피워 올리는 꽃이다.
☆★☆★☆★☆★☆★☆★☆★☆★☆★☆★☆★☆★
후회

        오세영

능금이
그 스스로의 무게로 떨어지는
가을은 황홀하다.
매달리지 않고
왜 미련 없이 떠나가는가.
태양이
그 스스로의 무게로 떨어지는
황혼은 아름답다.
식지 않고
왜 바다 속으로 잠기는가.
지상에 떨어져
꺼지지 않고 잠드는
불꽃이여,
우리도 능금처럼 태양처럼
스스로 떠날 수는 없는 것인가.
가장 찬란하게 잠드는 별빛처럼
잊을 수는 없는 것인가.
버릴 수는 없는 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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