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밭 가꾸기(시 창작방)

하로동선(夏爐冬扇)

럭키홍 2018. 2. 26. 16:41

     

                                 하로동선(夏爐冬扇)


                                                                     홍 종 승


삼동(三冬)을 이긴 보리는

이제 푸른 치마로 갈아 입고 있는데


지난 겨울 꽁꽁 얼은 

마음 한 가닥 붙잡고, 아직도

나의 사랑방 한구석에서 졸고 있는 히터녀석,


대낮 서쪽 하늘에 걸려있는

몽매한 반달처럼

실 타래같은 하얀 눈으로 나를 보고 있다


방안 액자 속의 말 한마디

-일근천하무난사, 백인당중유태화( 一勤天下無難事, 百忍堂中有泰和)-

뇌 속에서 번쩍하는 순간

녀석은 붉은 보자기를 입고 벽 속으로 숨는다


철 지난 가죽잠바를 세탁소에 맡기고 나오는데

아파트 약수터에 가로등 하나 하얗게 웃고 있다


때도 모르고  분수 없이 웃는 실 없는 자슥

너도 이제 죽어야 한다


여름에 화로가 살고, 겨울에 부채가 사는 날에는

나도  살 길 찾아 가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