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프랑스 등 선진국들은 원자력기술의 우위 속에 1980년대 말부터 세계시장 점유율을 한껏 끌어올리는데 주력해왔다. 안전성, 경제성에서 기존 원전보다 뛰어난 기종개발을 서두르고 있었던 것. 미국은 컨버스천엔지니어링이 개량형 원전인 ‘시스템 80 플러스’ 개발에 나섰으며, 웨스팅하우스 역시 ‘AP-600’ 개발에 적극적이었다. 프랑스 NP사도 1550MW급 ‘EPR’ 개발에 들어갔다. 당시 우리나라는 기술자립과 한국표준형 원전 건설이라는 명제 아래 영광 3~4호기 등 복제기술 확보에 매진해왔다. 아울러 설계기술을 응용, 한국표준형 원전을 완성하겠다는 꿈도 품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10년 이후를 염두에 둔 독자기술을 확보키 위해 준비해야 한다는 인식이 원자력계의 화두로 떠올랐다. 특히 국제적 신형원전 개발추세와 전력수요 등을 감안, 우리나라도 원전 선진국과 같은 수준의 대용량 신규 원전개발로 경제적인 국내보급은 물론, 수출까지 고려한 원전 설계개발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정부는 1992년 6월 종합과학심의회를 열고 차세대원자로 기술개발사업을 국가선도 기술개발사업(G-7Project)으로 확정했다. 또 그 해 12월부터 차세대원자로 기술개발사업에 본격 착수했다. 당시 산업자원부(현 지식경제부)는 국가적 역량집결을 위해 기술개발을 주관했으며, 기술개발추진위원회 구성·운영도 맡았다. 과학기술부(현 교육과학기술부)는 G-7과제 평가를 비롯한 종합관리와 인·허가 관련 규제요건 등 안전규제 기술개발지원을 주관했다. 또 국내 원전기술 자립기반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산·학·연이 공동 참여하는 기술개발사업단을 구성·추진했다. 기술개발사업 총괄은 한전이 담당했으며, ▲한국원자력연구소와 신형로연구센터가 핵심기술연구를 ▲한국전력기술이 플랜트 종합설계와 핵증기공급계통 설계를 ▲한전원자력연료는 초기노심와 연료집합체 설계를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이 주기기 제작검토와 기기설계를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이 인·허가 검토와 안전규제요건 개발을 각각 수행했다. 이처럼 차세대원자로 기술개발사업은 정부, 산업계, 연구계, 학계 등 원자력계의 모든 기관이 참여한 최초의 프로젝트였으며, 하나의 목표를 위해 모든 이해 관계자가 힘과 지혜를 모은 모범적인 사례였다. 마침내 2002년. 우리 기술로 독자 완성한 140만kW급 용량의 신형원전이 개발됐다. 그해 5월 7일 과학기술부로부터 국내 순수 개발모델이 표준설계인가를 취득, 착수한지 10년 만에 차세대원자로 기술개발사업을 성공적으로 끝마쳤다. 이 사업에는 10년 동안 연인원 2000여 명의 기술인력이 참여했으며, 총 2340여 억 원의 연구비가 투입됐다. 2003년 5월에는 특허청에 공식 상표를 출원·등록함으로써 차세대 신형원전의 명칭이 정해졌다. ‘신형경수로 1400(Advanced Power Reactor 1400)’은 이렇게 탄생했다. 가압경수로형인 이 모델은 현재 신고리 3~4호기, 신울진 1~2호기 건설에 적용 중이다. APR1400은 사고저항성, 안전설비 신뢰도면에서 종전 모델보다 크게 향상됐다. 비상사고 등 내부에 이상이 생겼을 때 원자로가 건전성을 유지하도록 설계됐다. 물론 기존의 원자로도 설계여유를 가지고 있지만, 이는 안전장치에 더 의존하는 방식이었다. 원자로 설계에 있어서는 안전성과 경제성을 동시에 추구했다. 원전이 매우 복잡한 설비로 구성된 이유는 안전성을 강화하기 위한 각종 설비가 추가됐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원전의 안전성은 달성될 수 있으나, 경제성 확보는 더욱 어려워질 수 있었다. 한 차원 높은 안전성과 경제성을 동시에 확보하기 위해서는 설비를 추가하는 기존 개념보다는 설계방식을 재검토해야만 했다. 설비 단순화, 표준화, 모듈화 등을 함께 추진, 전기출력을 대폭 늘리도록 설계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APR1400은 한국인 체형과 습성까지 고려하는 등 섬세한 부분까지 반영해 설계됐다. 소형 워크스테이션으로 필요한 모든 정보를 제어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기존 원전에서는 과도기시 운전원이 처리해야할 정보가 너무 많은 점을 보완하기 위해서다. 대형 정보표시판도 설치해 발전소 전체상황을 한눈에 인식토록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