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대전 재 발견- 대전역, 대전역사는 대전 歷史다

럭키홍 2012. 8. 2. 11:50

대전 재발견 - (2) 대전역, 대전驛舍는 대전歷史다
1905년 개통 역사적 첫발
▲(좌측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1900년대, 1970년대 증기기관차, 1970년대, 1980년대, 현재모습, 현재 플랫폼 모습

일상에서 어디론가 떠난다는 것은 특별한 일이다. 설레는 마음을 안고 떠나든 슬픈 마음을 안고 떠나든 기쁨을 안고 떠나든 담담한 마음에서 떠나든…. 저마다의 사유(事由)에 따라 떠날 때의 감정은 다르지만 떠나는 순간 그 감정은 커질 대로 커지기 마련이다. 공항에서 비행기 탑승구로 나가는 순간이거나 철도역 플랫폼에서 열차에 오르는 순간 또는 플랫폼에 서서 열차가 들어오길 기다리는 순간이 더욱 특별하지 않을까. 플랫폼에 서서 끝까지 가도 만나지 않는 철도 레일을 바라다보면 더욱 그렇다. 끝내 만날 수 없는 평행선으로만 달리는 두 선. 간단할 수 없는 감정의 여운을 느끼게 된다.

공항이 없는 대전 사람들에게 이런 순간을 떠올려 보라고 한다면 대부분 대전역에서의 경험을 떠올릴 듯싶다. 그만큼 대전역은 대전 사람들에게, 대전을 자주 오간 사람들에게 특별한 곳이다. 교통수단이 부족했던 시절 장·단거리를 오가는 교통편 하면 철도였고 대전에서 기차를 타는 곳 하면 대전역이었다. 대전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별을 했고 다시 만났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대전역에서 타지로 나가고 타지에서 대전역을 통해 대전으로 들어온다. 그래서 대전역은 대전의 문(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외지인들에게 대전 하면 맨처음 대전역을 떠올리기 십상이고, 대전의 첫인상을 심어준 곳 하면 대부분 대전역과 그 주변을 든다.

서울 기점 166.3㎞에 있는 대전역은 그래서 대전 사람들에게든 타지 사람들에게든 특별한 곳이다. 그 특별함을 더해주는 것에는 ‘대전발- 0시50분-’이라는 가사로 시작되는 헤어날 수 없는 슬픔이 터질 듯 격한 감정을 토해내는 멜로디를 가진 노래도 한몫 한다. ‘대전 블루스’라는 이 가요는 1963년 개봉한 이종기 감독, 최무룡·엄앵란·신성일 주연의 영화 ‘대전발 영시오십분’에 삽입된 덕분에 장년 이상이면 거의 전 국민이 기억하는 노래가 됐다. 영화 줄거리·주연배우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도 가슴을 쥐어뜯는 듯한 멜로디와 구슬픈 가사, 특별한 인상을 주는 제목 때문에 대전과 대전역은 전국의 장년층 이상에게 깊게 각인됐다. 실제로 이 가요는 음반제작사 직원이 대전역에서 0시50분 열차를 앞에 놓고 헤어지는 두 남녀를 보고 작사를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한때 대전발 0시50분이라는 열차를 탈 수 있었다고 한다. 1959년 제33호 완행열차는 전날 서울을 떠나 대전역에서 선 다음 새벽 0시50분 출발해 종착역인 목포역까지 갔다. 현재는 대전역에서 호남선이나 전라선을 오가는 열차를 탈 수 없지만 1960년대 초까지 대전역은 분기역 영업을 했기 때문에 대전역에서도 경부선뿐만 아니라 호남선 등을 운행하는 열차를 탈 수 있었다.

이렇듯 특별한 기억과 기록을 갖고 있는 대전역이 문을 열고 영업을 시작한 때는 1905년 1월 1일이었다. 일본인들에 의해 경부선이 개통됐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이 막대한 자본을 들여 경부선 철도를 부설한 배경에는 만주·러시아로 뻗어나가고자 하는 야욕이 자리 잡고 있었다.

대전시사 등의 기록에 따르면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경부선을 구상하고 답사에 나선 것은 1892년이었고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면서 군용철도 노선으로서 경부선 노선이 구체화됐다. 1898년부터 1900년까지 다시 철도 노선 답사 및 조사가 두 차례 실시됐는데 1898년 조사에서는 대전이 포함되지 않았다가 1900년 조사에서 대전이 노선계획에 포함됐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최단거리로 최단시간에 식민철도를 건설해야 한다는 지침에 따른 것이다.

1919년 개축된 대전역사는, 규모는 대구역사를 본따고 바깥 쪽은 철도 역사상 처음으로 철강에 시멘트 인조석을 바른 게 특징이었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1920년 5월 지하도가 개통됐으며 1911년부터 공사 중이었던 호남선 가운데 개통된 역에 대한 부분영업이 시작됐다고 한다. 개통 후 대전역에서는 1917년 경부선의 경우 매일 최급 2호, 급행 4회, 보통 6회 운행됐고 호남선은 보통만 세 차례 운행됐다. 연간 이용객 수는 약 4만7000명이었고 소화물 취급량은 15만9603㎏이었다. 이후 1933년 연간 이용객 수는 약 51만4600명, 소화물 약 31만5400㎏, 화물 약 13만5600t으로 증가했다. 승하차객 수는 11배, 화물취급량은 15배나 많아진 것이다.

대전역의 이 같은 교통량 증가는 20세기 초까지 한적한 농촌마을이었던 대전을 교통과 유통의 요지로 발전시키는 매개체 역할을 톡톡히 했음을 입증한다. 우리 민족의 의도는 아니었지만 대전이 중부권 교통과 유통의 요충지 역할을 하면서 상권을 크게 키워갔다. 대전역 때문에 대전은 신흥도시 수준을 넘어 중부권 최고의 도시로 서서히 성장했던 것이다.

이후 대전역과 대전은 현대사의 궤적을 같이한다. 1945년 해방을 맞았고 1948년 정부수립을 거친 뒤 1950년 6·25 한국전쟁도 겪는다. 수많은 피란민이 목숨을 걸고 열차 지붕에까지 매달려 대전에 들어왔다. 1950년 7월 금강에 방어선을 쳤던 미군 제24사단은 북한군의 공세를 막지 못하고 후퇴했고 사단장인 딘 소장은 퇴로를 잘못 들어 금산 부근에서 포로로 붙잡혔다. 딘 소장을 구출하려는 30여명의 미군 특공대는 미카 129호 증기기관차를 타고 대전역으로 돌격해 오지만 대부분 전사하고 구출작전도 실패했다. 이때 이 증기기관차를 몰았던 김재일 기관사도 대전역에 진입하기 직전 적탄을 맞고 순직했다. 이 기관차는 최근 문화재로 지정돼 보수작업을 거친 다음 대전역 부근 대전조차장에 전시되고 있다. 한국전쟁 기간 전선(戰線)이 남북을 오르내리며, 1953년 마침내 휴전이 되면서 대전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도, 돌아오기도 했다.

현대사의 변화를 그대로 목격했던 대전역은 이제 고속철도인 KTX가 하루 평균 143회, 새마을호 32회, 무궁화호 54회 운행하는 규모로 성장했다. 매일 2만5000-3만명, 주말에는 약 5만명이 대전역에서 열차를 타고 내린다. 연평균 약 650만명이 대전역에서 열차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고 또 대전으로 돌아온다. 24만㎡가 넘는 면적에 남북으로 길이 약 3㎞인 대전역은 고속철도가 정차하는 역 가운데 규모 면이나 승·하차객 수에서 서울역, 부산역, 동대구역 다음으로 네 번째로 크다. 영등포역까지 포함하면 다섯 번째이다.

누구나 한번쯤 플랫폼 가락국수를 파는 매점에서 급하게 국수를 먹은 경험이 있는 대전역은 이다시 큰 변화를 눈앞에 두고 있다. 코레일 본사와 한국철도시설공단이 입주할 28층 규모의 쌍둥이 빌딩(높이 136.6m)이 오는 9월 완공될 예정이다. 면적 4223㎡인 대전역사는 이때 확장을 할지 말지 아직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다. 복합역사로 탈바꿈시킬지를 놓고 대전시와 대전시동구가 의견일치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언젠가는 남북철도가 연결되고 또 유라시아철도와 연결되면 대전역은 대전 시민들에게 대륙으로 뻗어나가는 역이 될 것이다. 대전역에서 서울·부산까지가 아닌 평양, 신의주, 중국, 시베리아, 유럽까지 가는 열차표를 살 수 있는 날을 꿈꾸어 본다. <글 류용규·사진 빈운용 기자> <옛 대전역 사진=오진수 사진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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