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은 충청도 래유 ~ 나는 조영남의 ‘내 고향 충청도’노래를 좋아 한다. 리듬가락이 흥겹기도 하고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나를 키워 준’, ‘살다 정든 곳’ 등의 가사가 나의 경우에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 1975년에 대학 다니며 4년을 지내고 7년을 부산에서 살다 다시 86년 대전에 와서 직장생활까지 합하니 대전에서 생활한 지도 그럭저럭 20여년 넘어 4반세기에 가까워 오는 것 같다. 이제 나는 대전 사람이 되었고 앞으로도 자랑스런 대전과 함께 살아갈 것이다. 예전과는 달리 요즈음의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는 시도 지역별로 특성화하여 편집,발행되고 있으며, 이에 따라 학교에서도 ‘내 고장 유래 알아보기’, 유적 문화재 탐방 후 소감문 제출하기’ 등의 과제를 아동들에게 부여하고 있다. 아주 신선한 사회교육 프로그램이라 생각된다. 사실 오랫동안 살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대전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어 아들녀석의 사회생활 과제에 별반 도움을 주지 못했다. 부끄러웠다. 외지 사람들이 대전을 ‘뿌리없는 도시’. ‘일제가 놓은 철도 때문에 발전한 신흥도시’, ‘주인없는 도시’, ‘뜨내기 도시’라고 조롱하고 비하하여 말을 하여도 반박 한 마디 하지 못하고 묵묵히 들을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부끄러움이나 면해 보고자 쬐끔(?)의 관심을 기울였더니 대전이 뿌리있고 살 맛나는 도시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대전은 먼 옛날 선사시대부터 삼천(三川. 대전천,유등천,갑천) 부근에서 사람이 살기 시작한 이래 마한-백제-통일신라-고려-조선을 거치면서 역사의 한 축을 이루며 당당하게 맥을 이어왔다. 1905년에 경부선이, 1913년에 호남선 철도가 개통됨으로써 교통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던 대전은 지속적인 발전을 해 오다가 1989년에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주변의 넓은 지역을 편입하여 서울특별시 다음으로 큰 시(市)가 되었다. 1973년부터 조성하기 시작한 대덕연구단지는 60여 개 기관들이 입주함으로써 첨단 과학의 메카로 완전히 자리잡았으며, 1993년에는 국제무역산업박람회(EXPO[Phantom1])를 개최함으로써 ‘세계의 도시’가 되었다. 둔산에는 신시가지가 조성되었으며, 3군본부와 3군대학이 이전하였고 정부 제3종합청사 건물도 있어 ‘제2의 수도’가 될 것이 확실하다. 대전(大田)이란 지명은 우리 말 ‘한밭’에서 따 왔다. 아직까지 일제시대 경부선역이 생기면서 붙여진 이름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어느 시민단체에서는 ‘일본 냄새가 물씬나는 대전이라는 이름을 태전(太田) 으로 바꾸어야 한다’며 가두성명운동까지 벌인 적이 있었으나 제시한 근거가 미약하여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그 근거란 1932.3. 호남일보가 편찬한 충남발전사 내용 중에 ‘대전은 당초 태전이라 불렸으나 이토 통감이 이곳의 형승웅위(形勝雄偉) 함을 보고 대전이라 바꾸도록 명령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전이란 지명은 그 훨씬 이전 숙종 때 문헌인 동국여지승람에도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숙종 이전부터 사용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한밭은 대전천.유등천(버드내).갑천이 빚어 만든 땅이다. 삼천이 한 데 모여 비옥한 땅을 이루어 내고 금강에 합류한다. 이 하천 유역에서 대전 최고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회덕.덕진.유성.진잠으로 이어지는 반달 모양의 지역이 옛 대전의 중심이었다. 현재의 지명은 대개 고려말에 명명된 것으로 백제시대 대전지방은 회덕에 우술군(雨述郡)이 자리 잡고 덕진에 소비포현(所比浦縣),유성에 노사지현(奴斯只縣), 진잠에 진현현(眞峴縣)이 설치되어 지방행정이 시행되었다. 위의 지명이 변천되어 온 과정은 다음 표와 같다. 區分 百濟 統一新羅 高麗 朝鮮 懷德 우술군(雨述郡) 비풍군(比豊郡) 회덕군(懷德郡) 회덕현(懷德縣) 德津 소비포현(所比浦縣) 적오현(赤烏縣) 덕진현(德津縣) (左同) 儒城 노사지현(奴斯只縣) 유성현(儒城縣) (左同) (左同) 鎭岑 진현현(眞峴縣) 진령현(鎭嶺縣) 진잠현(鎭岑縣) (左同) 회덕은 일제 때 진잠.공주군 일부를 합쳐 대전군으로 개편하였으며, 이후 면(‘17년)-읍(‘31년)-시(‘45년)로 변천하다가 ‘89년 직할시로 승격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따라서, 대전의 모체는 회덕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회사 앞 적오산에 위치한 산성의 이름을 적오산성 또는 덕진산성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표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둔산(屯山)은 대전에서 가장 오래 전에 인류가 살았던 지역임이 확인되었다. 지금의 둔산선사유적지 부근에서 `91년도에 구석기,신석기, 청동기 유물 및 유구가 발굴되었다. 진잠 또한 역사가 깊은 곳인 바, 마한(馬韓)의 54개 부족국가 중 신흔국이 여기에 자리를 잡았다. 주변에는 그 시대(청동기시대) 유물인 고인돌(古石基)과 성터 등 유물.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청동기 유물은 서구 괴정동 현 서중학교와 서구 탄방동 세등선원자리에서 `67년도에 다량 출토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한편, 백제의 국경선과 중요 교통로는 금강이었다. 백제시대 대전은 국방의 요충지이자 수도 공주의 울타리 또는 대문 역할을 하였다. 계족산에서 식장산 쪽으로 이어지는 능선과 산성(山城)들은 신라와의 접적지역이었고, 대전은 최전방 국경도시었다. 이곳에서 두 나라는 국운을 걸고 처절하게 싸웠다. 그 당시 옥천.보은 등은 신라의 땅이었다. 대전지방에는 무려 38개의 성(城)이 있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성이 많기로는 전국에서 으뜸일 것이다. 대전의 진산(鎭山)으로 크게는 계룡산을, 작게는 계족산을 친다. 진산이란 그 지역을 지켜주는 주산(主山)으로 ‘지킴산’이라고도 한다. 대전에 있는 학교의 교가(校歌)가사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산이 다름 아닌 계룡산이다. 풍수지리 상 계룡산은 ‘산태극수태극(山太極水太極)’,‘회룡고조(回龍顧祖)’ 형상을 지니고 있는 비지(泌地)로 일컬어 진다. 백두산이 남으로 뻗어 내려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으로 갈리며 한반도의 척추를 이루다가 그 정기가 한반도의 끝에 가서 뭉친 곳이 지리산이며, 지리산의 정기가 거꾸로 북상하여 탄생시킨 곳이 산태극 계룡산이다. 계룡산을 휘감아도는 수태극 금강(錦江)은 전북 무주 덕유산에서 발원하여 북으로 흐르다가 계룡산의 등을 돌아 공주, 부여를 거쳐 장항,군산으로 흘러 들어가는 7백리 장강(長江)이다. 계룡산과 금강이 빚어 내는 지세가 마치 음과 양이 서로 어우러진 태극의 모양을 띠고 있다 하여 산태극수태극이라 한다. 한편, 회룡고조란 지리산에서 올라온 계룡산이 머리를 돌려 모태(母胎)인 지리산을 바라보는 형상이라는 뜻이다. 회룡고조와 산태극수태극이 합쳐진 곳이면 천하에 둘도 없는 명당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는 신도역사(新都役事)를 벌였고, `84년 이른바 ‘620사업(3군 본부 이전사업)’ 으로 강제철거된 신흥종교의 총본산으로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대전의 지형은 균형이 잘 잡힌 아늑한 분지형이며, 산은 동(계족산, 식장산), 서(계룡산), 남(보문산) 방향에서 두드러지고 물은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형국이다. 대부분의 지형이 북고남저(北高南低)인 우리나라에서는 물이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고장을 역수지향(逆水之鄕) 이라 일컫는다. 영남.호남.기호 지방 등 모든 지역을 이어 주는 교량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해 내는 곳이 우리 대전이다. 그래서 중도(中都)라 별칭하고 있다. 옛날 대전 땅에는 네 갈래 큰 길이 있었다. 유성구 월평동 신신농장 앞 길, 세천에서 옥천으로 넘어 가는 길, 도마동.진잠에서 연산으로 가는 길, 회덕에서 신탄진.문의.청주 쪽 길이 그것이었다. 오늘날의 큰 길들도 옛 길들과 거의 비슷하다. 이 길의 좌우에는 어김없이 길을 지키는 산성이 세워졌다. 이 길을 통하여 문물의 교역이 이루어지고 군사가 이동하기도 아였다. 신신농장 앞 길은 안산동.대평리를 거쳐 공주로 들어가는 직행로였다. 1913년 박정자.공암을 거쳐 마티고개를 통하여 공주로 가는 길이 열리기 전까지는……세천.옥천 길에는 백제 동성왕이 신라의 공격에 대비하여 성책(城柵)을 세운 탄현(炭峴)이 있었다. 탄현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세천과 옥천 사이의 고갯길인 마달령(馬達嶺)이 가장 유력하다. 진잠.연산 길은 백제 수도 부여로 가기 위한 길어였으며, 회덕.청주 길은 신라가 고구려를 침공할 때 이용했던 큰 길이기도 하였다. 위에서 살펴 본 몇가지 사실만으로도 대전의 ‘깊이’와 ‘너비’를 알 수 있다. 백제 시대 이후에도 대전과 대전 사람들이 한반도에 끼친 영향 또한 지대하였다. 일제는 1905년에 경부선 철도를 놓으면서 현재의 정동(貞洞)에 대전역사(大田驛舍)를 세웠다. 우리 민족과의 마찰을 우려해 뼈대있는 회덕 쪽은 일부러 피하였다. 이때부터 역 부근인 원동.중동.인동.삼성동 등을 중심으로 일본식 시가지가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회덕역은 30년이 지난 1935년에야 세울 수 있었다. 1932년 충남도청이 공주에서 이전 함으로써 대전은 명실상부한 중심도시가 되었다. 근세사만을 대전을 뿌리없는 도시라고 폄훼(貶毁) 함은 곤란하다. 어느 도시에 견주어도 역사상 손색이 없는 자랑스런 우리 대전을 사랑하자. 대전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우리의 자녀들에게도 대전을 얘기해 주자. 그러려면 관련 책자를 탐독하고 자료를 모으고 열심히 뿌리를 찾아 보아야 한다. 현장을 답사한다면 금상첨화다. 의문사항을 해소시켜 주는 곳도 의외로 많다. 대전의 현재는 행정수도 이전이라는 국사와 더불어 다나믹하게 변하고 있으며 그속에서 나역시 역동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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